라디오 > 표준FM > 격동 50년 방송 : AM 11시40분 ~ 12시    해설 : 원호섭   작가 : 이석영   연출 : 오성수
방송 작품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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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70화 민주화 연대기(年代記)
  69화 대한민국 전직 대통령
  68화 16대 총선과 낙천·낙선 운동
  67화 참여정부의 도전과 위기
  66화 아홉 굽이 헌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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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63화 개혁시대

개혁시대

극본 : 이영미

연출 : 오성수

방송:
2007년 11월 1일~2008년 1월 31일(79회 예정)


▷ 기획의도
 
이제 우리는 또 하나, 새로운 정권의 탄생을 목전(目前)에 두고 있다. 머지않아 탄생될 새 정권은, 이런저런 시대적 요구를 받게 될 것이다.
  과거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각 정권은 그 시작점에서 항상
개혁(改革)’을 주창해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개혁이 시대적 소명’이라며, 입을 모아왔다. 그래서인지 정권 초 개혁을 추진하던 칼날은 시퍼렇게 날이 서 있었고, 국민들은 적잖은 지지와 기대 속에서 그 개혁의 진행 과정을 눈여겨 보아왔다.
  시대적 소명이라고 하던 개혁은, 그러나 시간을 거듭할수록 좌절되기 시작하다가 결국은 역사의 이면으로 슬그머니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면 개혁이라는 단어는 단지, 새로운 정권을 수식하는 수식어로만 사용되었다는 말인가? 그게 아니면, 개혁을 좌절시키는 다른 어떤 이유가 존재했기 때문인가?
  새로운 정권의 탄생 이면에는 적지 않은 이권이 개입되어 있다. 그 이권은, 정권이 탄생된 이후 끊임없이 그들의 지분을 요구한다. 이와 같은 과정이 반복되면서 개혁은 추진력을 잃게 되고, 이런저런 비리 사건이나 게이트가 터져 나오고 만다. 그밖에도 개혁이라는 이름은 정적(政敵)을 제거하기 위한, 수단으로 동원되기도 했다.
  새 정권 탄생 이후, 시대적 소명이라고 주창하던 개혁이 단지 구두선(口頭禪)에 그치지 않고, 정권 초기의 추진력을 바탕으로, 새 시대를 여는 정권으로 역사에 자리매김 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 해답은 개혁이 좌절될 수밖에 없었던 과거 정권의 교훈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격동 50년은
제 63화 ‘개혁시대’를 통해, 준엄한 역사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 


 
주요 내용
- 문민정부의 탄생과 개혁 과제
- 군, 검찰 개혁과 개혁의 이름을 내건 사정 한파
- 금융실명제법과 불안한 경제 개혁
- 김현철 사단의 등장
- 김현철의 인사 전횡과 한보 사태
- 이회창과 김현철의 대결
-  YS, 눈물을 머금고 아들을 감옥 보내다

- DJ 정권의 탄생과 개혁 과제
- JP와의 지분 다툼, 개혁의 한계
- 국가 정보기관의 개혁
- 권노갑 등에 의한 인사 개혁과, 정치 개혁의 실종
- IMF 체제 극복과 경제 개혁, 그리고 그 한계
- 권노갑과 DJ의 아들들의 대결
- 개혁의 한계에서 필연적으로 파생된 게이트
- 개혁의 몰락

- 참여정부의 개혁 과제와 공과(功過)


 ▷ 줄거리
 
  1992년 12월. 문민정부가 탄생했다.
  개인적으로는 대통령직에 대한 무한 집념을 불태워 온 YS의 인간 승리였으며, 역사적으로는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등 군사 정권과의 고별이기도 했다
  문민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뜨거웠다. YS에 대한 초기 지지율은 90%에 육박했다. 그와 같은 국민의 지지를 등에 업고, YS는
개혁의 칼날을 치켜들었다.

  먼저
군부. 한국 군부를 좌우해 왔다고 해도 좋을 하나회가 YS의 군 개혁 의지 아래, 와해되고 만다. 대한민국 군 역사상 유래가 없다고 해도 좋을 일이었다. 그러나 문제는 대통령 선거 직전, YS에게 줄을 대고 선 군인들이 있었다는 점. 대표적인 인물은 국방부 차관이던 권영해. 그는 비 하나회라는 이유로 군부 내에서 외면을 받아왔던 인물로, 대선 후보이던 YS에게 상당한 군 정보를 제공해 왔다. 말하자면 YS가 정권을 잡은 이후를 대비해온 것이다. 그와 YS를 이어준 연결 고리는 김현철이었다.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는 국방부 장관에 취임했으며, 하나회 일소(一掃)라는 역사적인 일을 하게 된다. 그러나 그는, 그 자리에 자신의 인맥들을 심어놓으려 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결국 역사적인 YS의 군 개혁은 반쪽자리 개혁이 되고 말았다.

  다음은
검찰. YS 초기 검찰총장은 박종철. TK 출신이다. 김현철 등은 TK 검찰을 PK 검찰로 바꾸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검찰을 통한 정치권의 대대적인 사정작업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터. 그러나 박종철 이후의 검찰총장 후보군 역시 PK와는 별 관련이 없는 인물들. 그 와중에, 이른바 슬롯머신 사건이 일어난다.
  YS의 의지에 발맞추어 검찰 안에서는 대대적인 사정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홍준표가 주도한 이른바 슬롯머신 사건에 차기 검찰총장 후보군(候補群)-신건, 전재기, 이건개-이 모두 걸려든 것. 결국 이 일로 YS는 차기 검찰총장으로 PK 출신의 김도언을 세울 수 있었을 뿐 아니라, 정치적 숙적 박철언까지 처벌하는 일거양득(一擧兩得)을 취하게 되나, 검찰 개혁은 이루어지지 않고 만다. 그저 TK 지배하에 있던 검찰이 PK의 지배를 받게 된 정도라고 할까.

  1980년 중반, 한국 경제는 이른바 3저(底)-저유가, 저금리, 저달러-의 호황을 누려왔지만, 그러나 그것이 한국 경제를 근본적인 호황으로 돌려놓지는 못했다. 하여, 문민정부 경제 정책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는 높았다. 문민정부 초기, 경제 정책의 책임자는 박재윤 한국금융연구원 원장. 그는 이른바 신경제 100일 계획을 내놓았다. 정권 초, 빠른 시일 안에 경기 부양을 해, 경제를 살려놓은 다음 대대적인 수리를 하겠다는 게 주요 골자. 그 일면에는 정권 초 가시적(可視的) 성과를 원했던 YS의 염원도 반영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개혁에 대한 YS의 염원은 높아서 전(前) 정권, 그 누구도 실시하지 못했던 금융 실명제를 극비리에 추진하는 등의 큰 의욕을 보였지만, 결국 YS의 ‘깜짝 쇼’적 경제 정책은 실패로 돌아가고,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하는 이른바
환란의 시대를 초래하고 만다.

  YS 개혁이 실패하는 몇 가지 요인 가운데 한 가지는, YS의 차남
현철이다.
  YS가 대통령 후보이던 시절, 그는 여론조사 연구소를 운영하면서 YS의 훌륭한 참모 역할을 했다. 그런 아들에 대한 아버지로서 YS의 신임 또한 적지 않았다.

  그러나 문민정부가 탄생하면서 김현철이라는 존재는, 권력의 실세로 급부상한다. 돈과 정보, 권력이 그에게 집중되기 시작했으며, 김현철은 적극적으로 국정 운영에 관여하게 된다.

  정권 말기
한보사태가 터진다. 한보사태 관련, 김현철에 대한 국정조사 등이 이어지는 가운데, 김현철은 검찰의 조사를 받게 된다. 그 과정에서 비뇨기과 의사 박경식이, 김현철이 YTN 사장 인사에 개입한 CCTV를 폭로하면서, 김현철의 국정농단에 대한 대(對) 국민 여론은 급격히 나빠진다. 그런 한편 심재륜을 수장으로 하는 대검중수부는, 김현철이 안기부 기조실장 김기섭과 공모해 관리하던 YS의 대선자금의 실체를 찾아내고, YS는 정권 유지를 위해 아들 김현철을 감옥으로 보낸다. 살아 있는 권력에 대한 사법적 단죄가 이루어진 셈. 정치, 권력 개혁에 대한 국민들의 염원이 더욱 높아진 가운데…, 그렇게 문민정부는 막을 내린다.

  1997년 12월,
국민의 정부가 탄생한다.

  국민의 정부 출범 초, DJ가 가장 경계한 것 가운데 하나는 이른바 측근 관리였다. YS의 아들 현철과 그 가신들의 전철을 되밟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DJ의 최측근 권노갑은 일본 외유 중이었는데, 한국으로 들어오지 못했으며, DJ의 아들들 역시 그 활동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DJ는 이른바
개혁을 시도하는데, 공동 정권의 한 축인 JP와의 지분 문제가 걸림돌로 작용했다.
  비교적 개혁적인 색채가 강하던 DJ와 원조 보수로 일컬어지는 JP의 공동 정권에게, 개혁이라는 과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민련은 모든 부분, 심지어 청와대 비서진까지 동수로 구성하자고 요구했을 정도다. JP의 입김을 등에 업고 내각으로 진출한 인물들이 적지 않았으며, 이와 같은 일련의 상황에서 적잖은 권력 다툼이 일어난다. 그리고 이 모든 갈등의 핵심은 내각제를 위한 개헌을 할 것인가 말 것인가, 다시 말해서 누가 권력의 주체가 될 것인가였다. 국민들이 염원하던 개혁은, 권력 다툼을 하는 이들에게는 부차적인 문제였다.

  실질적으로
내각제를 위한 개헌은 쉽지 않았다. 일단 한나라당 역시 찬성하지 않았으므로, 내각제 개헌을 위한 법 개정이 국회를 통화하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었다. 정치 9단 JP가 그와 같은 현실을 모를 리 없었고, 때문에 내각제 개헌 유보는 자연스러운 결론이었다.
  그러나 공동정권인 국민회의와 자민련 합당의 명분은 내각제 합의 개헌이었고,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에서 국민회의는, 법안 하나를 통과하는 문제에도 자민련의 도움을 얻을 수 없었다. 자연, 정권 초 개혁의 추진력은 방향을 잃고 표류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와 같은 정치적인 이유에서 개혁은 지지부진을 거듭하게 된다.

  한편
IMF 체제 하에서 출범했던 국민의 정부 경제 정책.
  국민의 정부에게는 하루빨리 IMF 체제를 극복해야 한다는 커다란 숙제가 주어진다. 경제수석 강봉균을 위시해, 경제정책 입안자들은 기업의 구조조정을 주도했으며, 적지 않은 기업들이, 경쟁력이 떨어지는 자회사를 매각해 빚을 줄여야 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흐름에 반(反)하는 기업이 있었다. 바로 대우그룹.

  
대우그룹의 김우중 회장은, DJ가 대통령 후보이던 시절, 엄청난 정치자금을 지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였는지, 국민의 정부 초 김우중은 전경련 회장 등의 직책을 맡을 수 있었다.
  그러나 대우는 이미 병든 기업이었다. 무차별적인 차입 경영과 그로 인한 천문학적 빚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 이를 파악한 국정원에서는 지속적으로 대우의 부실에 관한 보고를 DJ에게 올리기 시작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김우중은, DJ와 각별한 인연이 있는 무기상 조풍언을 찾아 미국으로 간다. 김우중은 대선 때 자신이 지원한 수표 등의 사본을 내보이며 DJ정권을 협박하기에 이르고…. 이에 DJ는 서서히 김우중을 멀리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대우는 경제논리에 의해 와해되고 만다.

  DJ 정부 경제논리에 반할 뿐 아니라, 한국 경제에 엄청난 부담을 초래한 대우에 대한 구조조정을 왜 서둘러 하지 못했을까? 역시 대우 측에서 제공한
대선 비자금이 그의 발목을 잡았던 탓이다. 한보 정태수 회장이 YS에게 지급한 대선 비자금으로 국정의 발목을 잡았다면, 대우 김우중 회장 역시 대선 비자금으로 DJ의 발목을 잡았던 것. 다만 한보사태와 대우사태의 다른 점이 있다면, YS의 경우 정권 말기, DJ의 경우 정권 중간에 표면으로 드러난 시점의 차이가 있었을 뿐. 어쨌든 이와 같은 예에서 볼 수 있듯 대선 자금 지원으로 인한 재벌과의 유착, 그 천문학적인 비자금은, 개혁의 발목을 잡는 복병(伏兵)이었던 것이다.

  국민의 정부 정치 개혁이 실종된 원인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이른바
가신(家臣)과 아들들의 권력 다툼일 것이다. 한때 DJ의 분신으로까지 여겨졌던 권노갑은, 정권 출범 초 외롭고 고달픈 입장이었다. 한보 정태수 회장으로부터 받은 정치 자금이 문제가 되면서, 새로 출범하는 정권에 부담을 주지 않겠다며 일본 외유를 택했다. 이후 그는 쉽게 한국으로 들어올 수 없었다. 그가 한국에 들어오면 권력 다툼이 일어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던 것이다. 권노갑은, DJ가 대통령이 되기 전 DJ의 모든 것을 알아서 처리하던 인물이었으며, 또한 DJ의 자금줄이었다. 그가 DJ대통령 만들기에 헌신했던 많은 인물들을 챙길 것은 자명한 일이었고, 그와 같은 정실(情實)이 정치 개혁을 불가하게 할 것은 누구든 짐작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DJ는 끝내 권노갑을 외면할 수 없었다. 긴 세월 대통령 김대중을 만드는 데, 그가 들였던 노고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결과 DJ역시 가신으로 인한 YS의 부담을 고스란히 답습하고 만다.
  또한 아들 문제에 관해서도, DJ는 YS의 전철을 밟게 된다. DJ아들들의 권력 개입이 노골화 되고 가시화 되면서, 정권 초 개혁의 의지는 이미 실종되어버린 상태. DJ의 아들들과 권노갑은, 국영기업체의 인사나 무기 도입 문제 등 권력과 관련된 각종 이권 사업을 놓고, 극렬한 다툼을 벌이게 된다. 그 결과 정권 말기, 각종 게이트에 이들이 연루되면서, 정국은 만신창이가 되고, 그렇게 국민의 정부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마지막
참여정부.
  노무현이 대선 후보로 선출될 무렵, DJ는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놓여 있었다. 각종 게이트에 연루된 아들들이 문제였다. 때문에 이와 같은 분위기를 돌파할 보다 참신하고 개혁적인 인물이 대선후보로 필요했다. 노무현에 대한 DJ의 선택은 그와 같은 베이스를 깔고 있었다. 정권 재창출이 불가능해 보였던 새정치국민회의는, 경이로울 정도로 성장하는 노무현에 대한 유권자들의 지지율 상승에 탄복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2003년 2월 출범한 참여정부. 그러나 참여정부의 개혁은 적잖은 시련에 직면하게 된다. 새천년민주당에서 분당한 열린우리당으로 인한, 당내 기득권 인사들의 반발로, 초유의 대통령 탄핵 사태. 그리고 안희정, 이광재 등 노무현 대통령 측근들이 연루된 대선 비자금 문제 등…, 이 모두 그가 추진하려던 개혁에 적잖은 부담이 되는데….


▷ 등장인물
- 김영삼, 김대중, 김현철, 김종필(내각제 문제로 인한 힘겨룸에서 부분에서는 많이 나옴),
   이회창, 권노갑, 김홍일, 김홍업 등
- YS정권에서는, 박관용, 권영해, 그밖에 YS와 김현철 주변 인물들
- DJ의 주변에서는, 김중권, 천용택, 이종찬 등 DJ 주변 인물들과 JP 주변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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