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형마트에서.......사랑을 찾는다
글쓴이 | 바람에 안장 얹기
허태규 토요일 오후 5시, 고객들의 발길이 몰려드는 시간이다. 남편과 아내 가끔은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들이 한 주의 양식을 준비하기 위해 이 코너 저 코너를 기웃거린다. 33살의 노총각이며, 이 대형마트의 보안 요원으로 일하고 있는 나에게 이들의 모습은, 대형수족관의 열대어를 보는 듯한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가족이란 이름의 따뜻함. 그런 것을 한번도 소유하거나 공유해보지 못한 사람의 비애를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은.
하루에 몇 시간을 내내 서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주시해야 하는 나의 직업으로는, 사실 가족들이 풍기는 일상의 냄새마저도 음미하기 쉽지 않다. 생각보다 자주 작은 절도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대형마트의 구조 탓이다.
가족들 사이사이 젊은 연인들의 모습도 보인다. 사고 싶은 물건을 미리 정해두고 물품을 고루는 가족단위의 고객들과 달리 연인들은 대형마트 자체를 즐기러 오는 듯하다.
그녀도 그랬다. 나의 새로 이사한 오피스텔의 칫솔부터 실내화까지 그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였다. 홍차를 좋아하는 자신의 취향을 나에게도 권하며(거의 강압의 수준이었지만) 예쁜 홍차다기를 고르는데 열중해 있던 그녀의 옆모습도 떠오른다. 창가에 하늘하늘한 레이스 커튼을 달면서도, 주방 찬장에 그릇과 잔들을 정리하면서도 마치 시험을 치르는 사람처럼 그 일들에 집중했던 그녀. 내 집은 하루하루의 숫자가 바뀌듯 모양을 달리해 갔고, 신혼집처럼 반짝반짝 사랑의 윤이 났었다.
그러나... 그렇게 열중했던 에너지만큼, 그녀의 이별은 갑작스러웠고 냉정했다. 지금도 홍차 다기는 나를 아프게 한다. 매일 집에 들어가는 일이 고역이다.
한수민 “배달이요”
G사의 쉬폰 원피스가 도착했다. 사랑스런 연분홍빛에 연한 초콜릿색 꽃이 촘촘히 염색된 원피스다. 함께 배달된 샌들을 신고 마트를 향한다. 하늘을 날 듯한 기분이다. 내가 옷과 샌들을 가질 수 있는 시간은 이틀 정도. 다시 반품하기 전 이 짧은 시간동안 난 마치 화려한 패션쇼의 모델이 되는 것이다.
마트로 향하는 저녁 무렵의 하늘은, 새벽빛을 닮아 가슴을 시원하게 만든다. 귀에 이어폰을 꽂는 것도 잊지 않았다. 차분한 목소리의 여자 디제이 목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이승이 잠시 복사꽃 아래 잠긴 듯 황홀해진다.
허태규 요 주의 인물이 나타났다. 그 여자는 다른 고객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언제나 호텔 로비에서나 어울릴, 말끔한 정장 차림으로 카트를 끌고 다니는 여자에게선 어떤 불안의 떨림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그녀의 카트에는 전혀 물건이 쌓이지 않았으나 곳곳을 누비며 하나하나, 마치 물품을 검수하는 사람처럼 꼼꼼히 살피듯 다녔다. 왠지 여자가 어떤 작은 물건을 그녀의 가방에 쓱 넣지는 않을까하는 불안감이 솟을 정도였다. 그것은 마치 범인에 대한 심증은 있는데 물증이 없어 용의자의 뒤를 캐고 다니는 실력 없는 구태 경찰의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내 마음을 정확히 묘사한다면 여자가 어서 일을 저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싶게, 조바심을 피우고 있었던 것이다.
여자가 오늘 입고 온 하늘하늘한 분홍색 원피스가 눈에 띄지 않는 사각의 지대에선 가슴이 덜컥 내려앉아 여자의 모습을 찾는다. 그러나 이번에도 역시 여자는 아무것도 사지 않은 채, 또한 아무 것도 훔치지 않은 채 유유히 마트를 빠져나갔다.
여자는 마트라는 커다란 무대에 선 모델처럼 자신의 모습을 한껏 뽐내며 거닐다 사라진 것이다.
잠시 후 여자가 나가려는 순간 계산대 창구 보안대가 울리기 시작했다. 여자는 무슨 일이냐는 듯 순진한 얼굴로 계산원의 얼굴을 바라봤다. 나는 재빨리 여자에게로 가 정중히 인사를 하고 구석으로 여잘 데리고 갔다. 의외로 여자는 순순히 날 따라왔다.
“가방 좀 열어봐 주시겠습니까?”
“......”
“놀라신 거 압니다만 규칙상 직접 보여주시지 않으면 제가 가방을 압수할 수밖에 없습니다.”
계속 다른 곳으로 시선을 주고 있던 여자는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내게 무언가를 휙 던지곤, 돌아서 다시 걸어갔다. 내 발 아랜 여자가 던진 시디 한 장이 떨어져있었다.
여자는 너무도 당당히. 마트 밖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또각또각 구두 굽을 울리며.
한수민 온 몸에 경련이 인다. 큰 창피를 당할 수도 있었다. ‘한수민 너 왜 이래? 어?’
2개월 전.....
왠지 마음이 정리되지 않는다. 완연한 봄의 마루가 펼쳐진 5월. 금박가루를 부셔놓은 듯한 바다를 바라보며 눈부시다고 생각하고 있다. 꿈속의 한 장면이길 한없이 바라고 빌었던 어제의 심정과는 다르게, 혈관 속에 따뜻한 물이 흐르는 것을 다행으로 생각한다. 생. 각. 한. 다. 내 심장을, 노란 단추 하나를 딸칵 누르는 것으로 멈출 수 있다면, 난 어제 심장이 멈추었어야 했다. 남아있는 모든 사람들의 뒤통수를 치고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엄마를 용서해야 하는가. 그녀는 이미 죽을 수밖에 없었다. 자궁암의 뿌리가 온몸에 서릿발처럼 번진 지 오래였던, 말 한마디라고는 고통이 만들어내는 외마디뿐이었던 엄마. 그렇다고 해도, 아빠는 어쩌라고. 엄마는 언제나 그랬다. 엄마 자신만 중요했으니까. ‘니가 스무 살만 되면 난 떠날 거다. 저멀리 먼 땅으로’ 그곳이 어딘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어린 날 앞에 두고 세계지도며, 지구본의 구석구석을 가리켰던 엄마의 하얗고 긴 손가락. 그 손가락이 상징하는 건 불안이었다. 엄마가 아주 먼 곳으로, 날 혼자 두고 가버릴 것만 같은 두려움. 이런 두려움과 불안은 고등학교를 들어가면서 엄마와 거리를 만들었다. 한해 한해 시간이 지나는 것은 곧 엄마의 부재를 향해 가는 죽음의 항해와 같았다.
그런데...저 멀리 먼 땅으로 여행을 떠나겠다던 엄마는 결국 이 여행에서 왕복 티켓을 사지 않았다.
이것이 당신이 우리를, 남아있는 우리를 사랑하는 방법인가. 더 이상 추한 모습 보이기 싫다더니...하나밖에 없는 딸에게 마지막 병간호할 기회마저 빼앗아간 나쁜 여자.
엄마의 뼈가루는 동해 추암 앞바다에 뿌려졌다. 바다를 떠돌다 어디쯤엔가 태평양 너머, 당신의 고향에 닿길 원해. 죽도록 미운 엄마. 아니 죽도록 사랑하는 엄마...
허태규 눈이 계속 뻑뻑하다. 조명등의 강한 빛과 사람들의 북적거림 속에서 안구 건조증에 걸리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 계속 가짜 눈물을 넣다보면 또 우냐는 놀림을 받기 일쑤다. 오늘따라 양복이 답답하고 넥타이도 벗어던지고 싶다. 가끔은 이런 날이 있다. 나 혼자 사람들이라는 사막에 서 있는 기분. 매일 돌아다니는 수백평의 공간이 엘리베이터보다 더 답답하게 느껴지는 날. 아침에 면도하다 벤 곳이 계속 따끔거린다. 형수가 보내준 미수가루를 먹은 것이 영 더부룩해 죽을 지경이다.
또 그 여자다. 무슨 깡으로 또 나타난 거지? 상습범인가? 생긴 건 안 그래 보이는데... 그 날도 실수였다는 얼굴이었는데. 오늘은 학생 같은 복장이다. 파란색 소매 없는 티셔츠에 청바지, 하얀 야구 모자를 쓴 모습이 신선하고 귀여워 나도 모르게 웃음이 피식 새어나왔다. ‘허태규! 이거, 뭐야~ㅋㅋ’
계속 여자의 뒤를 좇고 있다. 오늘은 웬일로 물건들을 살 생각인가보다. 오늘 특별 세일코너에 나온 일본 그릇 세트가 최고 인기다. 여자도 계속 그곳에 서서 접시며 찻잔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그 모습에서 잠깐 예전 그녀의 얼굴이 스쳤다. 사랑이라는 놈의 흔적은 어떤 강력한 표백제로도 쉬 지워지지 않나보다. 이런 순간엔 가슴을 못으로 긁는 것 같은 아픔이 온다.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하냐 태규?’
쨍그랑!
여자가 그릇을 보다가 떨어뜨렸나보다. 떨어지던 접시가 쌓인 그릇들을 치는 바람에 한 줄이 몽땅 다 깨져있었다. 옆에서 함께 보던 아줌마들은 슬슬 피하는데 여자는 꼼짝도 못하고 깨진 그릇만 쳐다보고 있다.
“다치신 덴 없어요?”
“예? 아, 아니 괜찮아요... 어떻게 배상해야 되죠?”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여기 담당이 알아서 처리할 겁니다.”
가까이에서 보니 입술이 아기 같다.
“저...근데...혹시 지난번 그분?”
“절 아시나요? 전 처음 뵌 것 같은데.”
지금은 아니다. 아는 척을 하면 분명 무안해 죽을 것이다.
“혹 상황을 설명해주셔야 할 일이 생길지 모르니까 연락처 좀 알려주시겠습니까?”
여자는 이제야 제대로 내 눈을 쳐다본다.
“그럴게요.”
‘이 남자... *^=*’ ‘이 여자...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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