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11월 7일 (금) / 제 8 회
''박정희와 핵개발''
▶몇해 전, 박정희 시대의 핵개발 문제를 소재로 한 가상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
다>가 세간의 폭발적인 관심을 끌어모은 바가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구체적인 사
실 확인이나 역사적인 평가는 오랫동안 금기의 영역으로 자리잡아 왔다.
▶핵개발 문제를 언급한 최초의 공식문서는 지난 98년 비밀해제된 미국측의 기밀 전
문이다. 미국대사관과 본국 사이에 오간 전문의 내용을 보면, 70년대 중반경 한국정
부가 핵무기 개발을 위한 연구를 진행 중이었으며 미국은 동북아 정세를 고려해서
이를 적극적으로 만류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과연 사실일까?
▶69년 7월 닉슨 독트린 이후 박정희 정부는 자주국방론을 역설하며 무기 국산화에
박차를 가한다. 일부에서는 이 때 이미 핵무기 개발을 구상하고 있었다고 주장하기
도 한다. 70년대 한국의 핵개발 연구는 어느 수준까지 진행되었으며 그 결과는 무엇
인가? 그것은 원자력에너지 공급이라는 평화적 이용을 위한 것이었을까? 아니면 원
폭개발이라는 군사적 목적을 위한 것이었을까?
▲MBC 특별기획「이제는 말할 수 있다」그 여덟 번째 시간으로 11월 7일(일) 밤 11
시 30분부터 50분 동안 방송되는 ''박정희와 핵개발'' 편에서는, 당시 이 사업에 참여
했던 과학자와 관료들의 증언을 통해 핵개 발 사업의 진상을 알아본다. 더불어 박정
희 시대의 핵 연구사업을 둘러싸고 당시 국제사회의 시각은 어떤 것이었으며, 미국
의 인식처럼 당시 남한 핵개발이 남북관계나 동북아 안정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
던 것인지도 짚어봄으로써 핵문제를 대하는 우리의 관점을 재정립하는 계기로 삼는
다.
☞ 주요 내용
▲''10·26''과 ''박정희 핵개발'' 관련설의 진상은?
미국과의 갈등이 첨예하던 시기에 일어난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이로 인해 10·26과
미국의 관련설이 세간에 나돌면서 의혹이 증폭됐지만 결국 아무 것도 밝혀지지 않
은 채 수십 년이 흘러왔다. 그러던 중 94년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가 출간
된 후 핵개발 시도로 인해 저격당한 것이고, 그 배후에는 미국이 있었다는 주장으로
다시 한 번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다.
과연 10·26과 박정희 핵개발은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그의 소설 속에서와 같이 김진명은 "김재규가 재판에서 ''핵개발은 잠꼬대같은 것이
다''라고 말한 것은 미국의 시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다. 그런 것이 결국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저격으로 나타났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월간조선의 조갑제 편집
장은 다른 주장을 한다.
"10·26 사건과 핵개발과의 관계에 대해서 취재를 상당히 많이 했는데 제가 내린 결론
은 관계가 없다는 거다. 더구나 핵무기 개발 시도하기 때문에 박대통령 저격했다는
것은 소설적인 상상력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핵개발에 관련했던 과학자들은 한결같이 소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의 허구성
을 이야기하면서 ''이휘소''는 상관없는 인물이라는 말을 한다. 이휘소와 경기고 동창
이었던 당시 경제2수석실의 김광모비서관은 "물리학자로 노벨상도 받을 수 있는 사
람이었다. 하지만 핵개발과는 상관없고, 박대통령은 만난 적도 없다"고 말한다.
▲''프레이저 보고서''의 진실 확인!
"압록강까지 가는 미사일과 원자탄을 개발하라"
미 하원 <프레이저 보고서>에는 닉슨 독트린 이후 한국은 70년 말 국방과학연구소
와 함께 비밀리에 무기개발위원회를 만들었고, 무기개발위원회에서 핵무기 개발을
만장일치로 결정했다는 증언이 나와있다. 당시 무기개발위원회의 일원이었던 유재
흥 전 국방장관의 증언으로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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