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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검은 눈물 100일의 기록
2007년
12월 7일 발생한 허베이 스피리트호의 기름유출은 어촌의 꿈을 한순간에
앗아갔다. 푸른 바다는 시꺼먼 기름으로 뒤덮였고 생명이 살아 숨 쉬는
갯벌엔 기름얼룩만이 남았다. 순식간에 생활터전을 잃은 사람들은 망연자실했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기름 냄새 진동하는 바다에서 방제작업을 해야
했다. 충남 태안군 의항리(蟻港里)는 기름 직격탄을 강하게 맞은 곳이다.
만리포에서 이어지는 의항 해수욕장과 구름포는 천혜의 경관을 유지해왔으며,
주민 대부분은 바다에 의지해 생계를 이어왔다.
의항리의
겨울은 그 어느 해보다 매서웠다. 방제작업이 한창이던 지난 1월, 마을
어민 이영권씨는 부인과 자식들을 남긴 채 농약을 먹고 자살했다. 굴양식에
의존해 살던 어민들이 얼마나 절망의 나락으로 빠졌는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였다. 故이영권씨의 아들은 아버지의 임종 앞에서 눈물을 적신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의항리 사람들은 뒷산에 고인을 모시면서 ‘누가
이영권을 죽음으로 몰고 갔느냐?’며 울부짖었다. 제작진은 사고 이후
지난 100일간, 기름으로 뒤덮인 곳에서 어민들과 함께 부대끼며 그 고단한
삶과 꿈을 취재했다.
2.
여덟 살 소현이, “광대가 되고 싶어요”
태안군
소원면 의항분교는 검은 재앙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한 복판에 위치해있다.
전교생이 19명인 의항분교는 절반이나 되는 학생들이 조손(祖孫)가정이며,
대부분의 학부모들은 굴양식과 민박 등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전형적인
어민들이다. 이 학교 학생 13살 소원이의 조부모는 자그마한 농사와
굴양식을 하고 있다. 농사는 부업이고 굴양식이 주업인데, 지난 겨울
굴 수확할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가 기름벼락을 맞은 것이다.
태안의 굴 양식장 중에서 상당수는 대대로 이어오던 비인가 양식인데,
소원이네 역시 비인가라서 시름은 더 깊다. 소원이 할아버지는 ‘현금이라곤
39만원 밖에 남지 않은 처지에 앞으로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또
보상은 제대로 받을 수 있을 지 걱정이 되서 잠이 안온다’ 고 하소연했다.
학부모들이
모두 방제 작업에 참여하고 있기 때문에, 의항분교는 겨울 방학 내내
학생들을 돌보았다. 소원이와 동생 소현이도 겨울 방학 없이 겨우내
학교에 나가야 했다. 가수, 정원사, 제빵사, 미용사 등 8살 소현이는
되고 싶은 것도 많다. 하지만 소현이가 최근 가장 되고 싶은 것은 광대.
‘재미있는 일이 없어서 잘 웃지 않는 마을 어른들을 웃게 해주고 싶기’
때문이다. 광대가 되기 위해 소현이는 고양이와 함께 지옥 훈련(?)을
하지만, 웅대한 뜻을 몰라주는 고양이가 항상 꾀를 핀다.
3.
의항리 어촌계장, “정부와 삼성을 쳐들어가고 싶어요”
서해안
고속도로가 개통되면서 태안 일대는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 관광객으로
점차 활기를 띄어왔다. 의항리 어촌계장인 이충경씨는 민박과 낚싯배
영업으로 생계를 이어왔다. 지난 해 11월에는 은행 대출 3,500만원을
받아 낚싯배도 새로 구입했고, 의항 해수욕장 앞에 있는 방갈로 3채도
수선을 했다. 그런데 네 살 배기 남매 쌍둥이를 두고 있는 30대 충경씨
부부의 꿈이 무르익어 갈 무렵, 기름사고가 덮친 것이다. 가족의 꿈이
담긴 배는 운항 한번 해보지 못하고 기름 뻘 위에 내동댕이 쳐져있다.
민박손님도 없어 가끔 개인적으로 오는 자원봉사자에게 무료로 내어주는
게 전부다. ‘바다가 언제 살아날지 모르니, 도대체 무슨 계획을 세우겠느냐’며
부인은 눈물을 적셨다.
의항리
어촌계는 사실상 붕괴 직전이다. 전복과 해삼 양식을 통해 어촌계를
운영해왔지만 올해는 기름 때문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고기잡이 출어를
한다한들 과연 그 고기가 얼마나 팔릴 것인지 누구도 보장할 수 없다.
기름 때문에 굴은 전멸했고, 설령 지금 바로 포자를 뿌려 키운다해도
3년 후에나 굴 수확이 가능하다. 보상은 몇 년 후에나 가능할지 가늠할
수도 없다. 사정이 이러니 태안 어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해 있다. 어촌계장
이충경씨는 ‘정부와 삼성을 쳐들어가고 싶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4.
빼앗긴 바다에도 봄은 오는가?
올해
1월, 하승이가 태어나면서 김진성씨는 세 남매의 아빠가 되었다. 순식간에
들이 닥친 기름은 굴 양식장에 올인 했던 진성씨의 모든 계획을 물거품으로
만들고 가족의 생계를 위협했다. 생태계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무작정 바다만 바라보고 기다리기엔 가장으로서 어깨가 무겁다.
‘바다를 빼앗기면서 모든 것을 잃게 된 것 같다’는 진성씨. 그동안
해오던 어촌계 간사 일도 그만두고 새로운 직업을 찾아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다. 과연 빼앗긴 바다에 봄은 언제 올 것인가?
허베이
스피리트호의 기름 유출은 몇 가지 뚜렷한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우선,
규모에 있어서 ‘세계적 사건’이라는 점. 둘째, 연안어업의 터전에서
발생한 사고이기 때문에 ‘어민 공동체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 있다는
점. 셋째, 뛰어난 자연경관과 생태계를 보존하던 지역이라서 이를 ‘복원하는
과정 자체가 환경적 관심사’라는 점. 넷째, 가해자들이 책임을 회피하는
것과는 달리 백만명이 넘는 자원봉사 행렬이 이어졌다는 점 등이다.
‘MBC 스페셜’ 제작진은 태안의 검은 재앙을 앞으로도 꾸준히 관찰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