촬영현장에서 만난 이윤정 감독 인터뷰

드라마는 거짓말이다. 그것도 모두가 알고 있는 거짓말. 그건 일종의 약속이다. 우리는 TV(혹은 스크린) 앞에 앉아서 ‘그래 그래 뭐, 나쁘지 않아’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화면에 비치는 풍경과 표정들이 진짜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진짜라고 믿어주는 것, ‘오케이, 그럴듯해.’라고 인정하게 되는 것이 바로 드라마, 픽션이 우리에게 작용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윤정 감독은 그 ‘알고도 속게 만드는 거짓말’의 힘을 무력하게 만드는 감독이다. MBC 최초의 여성 드라마 감독으로, MBC 베스트극장 610화 <매직파워알콜>(2005년 2월)과 MBC 주말 옴니버스 <떨리는 가슴>의 ‘바람’편(2005년 5월), MBC 베스트극장 <태릉선수촌>(2005년 10월)을 연출한 그는 지금까지의 멜로드라마가 보여준 것과는 다른 방식의 리얼리티를 연출하는 신선함을 제시했다. 현재 한국 드라마 감독들 중에서 사람과 사람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가장 적확하게 표현해내는 감독, <매거진t>가 이윤정 감독을 주목하는 이유다. 장편 데뷔작이 될 <커피 프린스 1호점> 촬영 현장에서 만난 감독 이윤정, 그는 여기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어떤 것에 대해서 얘기한다.

“사랑에 대한 조금은 다른 이야기”

: <커피 프린스 1호점>이 장편 데뷔작이다.

이윤정 감독: 글쎄... 아무 심정 없다(웃음). 그 사이에 하나 엎어진 게 컸다. <식객>을 1년 가까이 준비하다가 못해가지고, 덕분에 잘 놀았다. <커피 프린스 1호점> 첫 방송이 원래 7월 14일이었다가 7월 2일로 옮겨졌다. 빠듯하다. 미니시리즈 준비하는 팀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미리 준비한 게 있어서 다행이다.

: 첫 장편 데뷔작으로 <커피프린스 1호점>을 고른 게 궁금하다. 지금까지 했던 작품과도 달라 뜻밖이기도 한데.

이윤정 감독: 이유가 있다. 물론 그게 꼭 이 작품에 대한 이유는 아니지만(웃음). <식객>이 엎어질 때, 회사에서 미니 시리즈는 단막이 아니다, 옴니버스도 아니다, 그런 얘기를 들었다. <태릉선수촌>은 기존의 상투성을 깨고 싶어서 30분 구성으로 갈 수 있었지만 이번엔 장편 데뷔하는 거니까 제약이 많았다. 아예 에피소드 형식으로 구성하는 것도 안 된다고 했으니까. 사실, 하면 했을텐데 겁을 먹은 거지(웃음). 작가들을 찾는 것도 어려웠다. 보통 데뷔할 때에는 미니 시리즈를 두 편 이상 써 본 작가, 그리고 이미 성공한 작가와 함께 해야 하는데 그렇게 따지면 몇 명이나 되겠나. 그래서 원작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원작을 찾던 중에 <커피 프린스 1호점>으로 결정했다.

: 이선미 작가는 어떻게 알게 되었나.

이윤정 감독: 원래 나는 로맨스 소설과 인터넷 소설도 구분하지 못했다(웃음). 시공사에 무작정 전화해서 작가들을 소개받거나 직접 찾던 중에 <내 사랑 원더우먼>과 <모던 걸의 귀향>을 접했다. 사실 로맨스 소설들 중에는 문장이 안 읽히는 작품들도 많았는데 이 작품들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모던 걸의 귀향>은 1930년대 얘기를 하면 재미있겠다 싶었지만 시간도 촉박하고 세트도 문제라서 다른 걸 찾아보니 <커피 프린스 1호점>이 있었다. 그냥 막 대구로 내려가서 이선미 작가를 만나서 당장 방송이 안 될 수도 있는데 하겠냐고 물었다. 그렇게 시작된 거다(웃음).

: 사실 <커피 프린스 1호점>은 굉장히 트렌디하면서도 통속적인 내용이다. 건방지지만 모성을 자극하는 재벌 2세도 나오고, 가난하지만 명랑쾌활한 여자 주인공도 나오고.

이윤정 감독: 원작하고 다르진 않다(웃음). 내가 워킹타이틀 영화사를 좋아하는데 그 영화들을 보면서 반했던 부분이 바로 사람들에게 익숙한 트렌디한 구조를 가져가면서도 거기에 진심을 담아 얘기한다는 점이었다. 환기된다고 할까, 그런 부분을 나도 미니 시리즈를 하면서 담고 싶었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 사랑하게 되는 게 뭘까, 그런 고민에서는 디테일이 중요한데 대부분의 드라마에서는 대부분 거칠게 표현되어서 그걸 깨고 싶었다. 게다가 이 작품의 설정에서 ‘남장여자’라는 게 중요한 요소라 흥미가 생겼다. 마음은 이미 이 사람한테 가 있는데 남자라는 이유로 어렵고 복잡한 게, 사랑에 대한 다른 면에 대해서 얘기할 거리가 생기겠다고 생각했다.

: 다른 방식으로? 사랑을 약간 다른 입장에서 풀어본다는 얘기인가.

이윤정 감독: 극중 여자주인공이 남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이미 시청자들과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금지옥엽>같은 건데, 이런 작품을 직접 보고 나면 ‘재미있다’싶지만 막상 처음부터는 별로 안 보고 싶지 않나(웃음). 이미 다 알고 있는 얘기니까. 디테일한 부분에 집중하면서 사랑에 대한 좀 다른 느낌들을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 ‘MBC 최초의 여성 드라마 PD’라는 타이틀도 있다. 이게 사실 꽤 심각한 타이틀인데(웃음), 부담감이나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나.

이윤정 감독: 굳이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평소에 현장에 있어도 그런 점을 잊어버린다. 지금처럼 밥을 꾸역꾸역 먹다보면 그렇게 16부 마지막이 오겠지, 이런 생각이나 할까(웃음).

“청춘은 누구에게나 있는 공통분모 같은 것”

: <태릉선수촌>이야말로 ‘이윤정’이라는 이름을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작품인데, 이 드라마에는 고민하고 갈등하고 부딪치고 아파하고 그렇게 커가는 아이들이 있었다. 가장 솔직한 ‘청춘’을 보여준 드라마였는데 청춘이란 어떤 것인가.

이윤정 감독: 글쎄... 특별하게 뭐 그런 건 없는 것 같고(웃음). 누구에게나 이런 건 있는 것 같다. 비틀스의 ‘Penny Lane’의 가사를 보면 정말 별 거 없는데, 불자동차가 지나가고 이발소도 나오고, 은행원도 나오는데 그걸 들을 때마다 어릴 때 내가 살던 동네와 겹쳐지는 게 있다. 국가도 다르고 시대도 다르지만 그 노래를 들으면 접속이 되는 부분이 있다. 그런 공통분모, 같은 것. 사람들에게 그런 게 작용한 게 아닐까.

: 성장 얘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이윤정 감독: 그렇다. 제일 좋아는 게 <케빈은 열 두 살>이다. 보면 항상 운다(웃음).

: 그런 순간. 가장 건강하고 예쁜 순간의 어떤 떨림을 잡아낼 때 주로 롱테이크를 쓰거나 투샷이나 풀샷으로 인물들을 잡는 것 같다. 작품을 보면 별로 티는 안나지만 은근히 많은데(웃음). 관계에서의 미묘한 떨림 같은 순간에 집중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윤정 감독: 콘티가 빚어내는 상황의 분위기라는 게 있다. 세트에서 배우들 빼고 스탭들이 신발 신고 돌아다니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불편한 상황이 된다. 그리고 관습적인 방식으로 배우는 기술 같은 게 있다. 인물을 잡을 때에는 다이렉트로 들어가지 마라. 투샷이면 바스트는 다른 각도로 옮겨라. 오버샷은 어때라... 등등. 형식이 어느 순간에 진심을 가둬버린다고 생각했다. 드라마라는 게 바스트 리액션이 위주인 장르이지만 이것 때문에 연기가 한정적이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한창 공부할 때 <섹스 앤 더 시티>를 조그 셔틀로 돌리면서 봤다. 내가 배우지 않은 방식으로 편집이 되었더라(웃음). 콘티가 사람의 감정에 충실하면 달라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사람이라면 당연히 장소나 빛이나 그런 주위 환경에 영향을 받고 그게 연기에도 영향을 주는데 그걸 무시하는 건 폭력 같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롱테이크를 그렇게 많이 안 썼다(웃음). 이번 작업하면서 느낀 건 롱테이크든 바스트 샷이든 호흡 조절에 따라 필요하다는 점이다.

“촬영 중에도 거짓말 같은 장면은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

: 그런 디테일한 부분들을 전에 없던 방식으로 연출하기 때문에 이윤정 감독이라는 이름이 인상적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일종의 리얼리티인데, 특히 TV라는 환경에서 리얼리티를 연출한다는 역설이 있다.

이윤정 감독: <태릉선수촌>에 보면 민기가 수아 방 앞에 과자를 쌓아두는 장면이 있다. 누가 사람들 지나다니는데 그걸 언제 쌓았을 거야, 라고 말한 적도 있는데(웃음), 내 안에는 그런, 너무나 순정 만화처럼 그리는 과장 같은 게 있다. 유아적 공주병에 빠진 게 아닐까하는 두려움도 있다(웃음). 그래서 반성도 하고. 드라마도 똑같다. 리얼리티와 반대인 지점인 것 같지만, 내가 그렇게 생겨 먹었으니 나한테는 그게 리얼리티다. 진심의 전달 방식이 있는 거니까. 촬영하면서도 뭔가 이거 거짓말같은데... 라는 부분이 있으면 그냥 넘어가지 말자고 생각하게 된다.

: 그래서 기존 이미지가 강한 배우들에게서도 다른 느낌들을 잡아내는 것 같다. <매직파워알콜>의 김민선과 김동완이 그랬고, <떨리는 가슴>에서 김창완, 최강희도, <태릉선수촌>의 이민기, 최정윤도 그랬다.

이윤정 감독: 그 부분의 천재는 김병욱 감독님이다. 내가 무척 좋아해서 한번은 무작정 만나서 얘기한 적이 있다. 거기서 캐스팅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었더니, 자기는 그냥 배우들을 만나서 이런저런 얘기들을 해본다고 하시더라. 그 사람의 다른 부분을 끄집어 내는 게 아니라 그의 다른 부분을 발견하고 사랑하면 그렇게 되는 것 같다. 당사자도 나의 이런 부분을 사랑하는구나, 라는 느낌을 받으면 또 달라지고. <스탠 바이 미>를 보면 그 만만치 않은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놀라운데 촬영 전에 합숙하면서 캐스팅했다는 얘기를 듣고 아하, 그랬다. 진짜 그 배역과 비슷한 사람을 캐스팅했다고 하더라. 나도 아역 배우 뽑듯이 캐스팅을 한 것 같다.

: 이번 작품에서 윤은혜와 공유도 그런 마음으로 뽑은 건가?

이윤정 감독: 그렇다. (윤)은혜는 처음 만나서 얘기를 하는 도중에, 5분 만에 울어버렸다. 별 얘기 아니었는데 자기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던 것 같다. 2시간 정도 얘기하고 나서 내가 저녁에 ‘당신이 신인 연기자였어도 내가 했을 것 같습니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느낌이 참 좋은 사람이구나, 생각했다. 되게 맑은 사람이다.

“사람이 카메라 앞에서 기계적으로 다뤄지는 건 싫다”

: <매직파워알콜>은 직접 대본도 썼는데 연출과 대본을 함께 할 욕심도 있을 것 같다.

이윤정 감독: 많다. 그런데 작가의 일이란 게 정말 어려운 일이다. <매직파워알콜>을 하고 나서 나름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더라. 씨앗만 있지 진짜 작가가 되는 길은 멀고 험한 것 같다. 외국에서는 작가가 연출도 맡거나 작가 출신 감독들도 많은데 그건 작가의 역할을 굉장히 오랫동안 맡아서 가능한 것 같다. 연출이 작가되는 것 보다 작가가 연출되는 게 쉬운 것 같다. 작가들이 모를 뿐이지(웃음).

: 아까도 언급했지만, 한국에서의 워킹타이틀을 지향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떤 점이 그 집단의 매력일까, 그리고 정말 만들어낸다면 뭐가 필요할까.

이윤정 감독: 좋은 인력이 있으면 된다(웃음). <오만과 편견>을 보면, 수없이 리바이벌된 작품으로 또 무슨 얘기를 하려고 찍었나 싶은데, 막상 보면 아하, 그런 감탄이 있다. 그 많은 무도회 씬을 보면 내가 땀 흘리면서 냄새 맡으면서 본 느낌이다. 진짜 멋진 걸 보여줄게, 그런 태도가 아니라 이거 너무 재미있지 않아? 라는 느낌이랄까. 그런 태도가 중요하다.

: 진심, 마음, 태도, 이런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데 결국 연출이라는 것도 대상을 보는 태도, 시선의 문제가 아닌가.

이윤정 감독: 그렇다. 진심이나 마음. 그런 게 굉장히 중요하다. 그러면 두려워하지도 않게 된다. 무서우니까 과장되게 치장하고, 누군가를 배척하고 미워하고 화를 내게 된다. 두려워하지 않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들이다.

: 영화나 드라마 말고 다른 것들도 많이 좋아할 것 같다.

이윤정 감독: <빨강머리 앤>을 무척 좋아한다. DVD를 사놓고 마르고 닳도록 보고 있다. 밤에 문득 외롭고 그러면 틀어놓고(웃음). 이건 정말 볼수록 놀랍다. 원작보다 애니메이션이 훨씬 좋은 것 같다. 앤이 아침에 눈을 뜨고 문 밖을 나가는데 서리가 끼어 있다거나 나뭇잎이 몇 개 안 달린 풍경이라든가, 가짜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내가 보고 있는 느낌으로 묘사하는 게 대단하다. 예쁘게 보이기 위한 쇼트들도 아니고.

: 연출가로서 진짜와 가짜는 어떤 건가.

이윤정 감독: 그것 역시 마음인데, 음, 뭐랄까. 사실 이건 참, 이래도 저래도 말이 안 되는 것 같긴 하다(웃음). 드라마 클리세라는 게 있다. 그게 보통 갈등의 리액션에서 나타나는데, 사실 인간이 그렇게 단순한 존재가 아닌데도 그냥 그렇게 보여주는 걸 말한다. 즐겁다거나 화를 낸다거나, 그런 순간들에 사용되는 클리세들이 있는데 그건 인간을 너무 쉽게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들이다. 그래서 가짜인거지. 화를 푸는 과정도 굉장히 논리적이고 인과적인데 보통 그렇지 않은 부분들이 더 많지 않나. 드라마 클리세가 나쁜 이유는, 그걸 말 그대로 많이 써서 나쁜 게 아니라, 사람을 그 정도로 밖에 생각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나쁜 거다. 인간이 카메라 앞에서 기계적으로 다뤄지는 것 같으니까 사악하다고까지 표현할 수 있다.

(인터뷰) 차우진 lazicat@t-fac.com

(사진) 백가현 beck@t-fac.com

(편집) 이지혜 original-jh@t-fa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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