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사극 속 왕의 모습이 “어? 우리랑 다를 거 없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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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사극의 중심 무대는 궐 밖이다. 사극 속 왕들이 ‘궁’ 밖으로 나오고 있다.



	▲ SBS 월화드라마 <왕과 나> 포스터

‘폐하’께옵선 여전히 곤룡포에 익선관을 쓰고 등장하지만, 왕의 권위는 때로 한낱 내시보다도 하찮게 보인다. 장차 보위에 오르실 지존의 친구들은 하나같이 내시나 다모 따위 밖에 될 수 없는 미천한 집안의 자식들이다. 갈 데 없는 화전민의 아이들(<이산>), 또는 역적의 아들로 태어나 숲 속에 버려진 무녀의 양자나 몰락한 양반의 딸(<왕과 나>)만이 어린 왕의 ‘동무’들이었다.

사대부들의 역할 또한 제한적이다. 왕의 친구도, 왕의 스승도 모두 내시와 나인들이다. 왕의 ‘사랑’마저 언제나 궁 밖에 있다. 심지어 왕의 사랑과 ‘합궁’에까지 내시가 깊숙이 개입한다.

현재 SBS와 MBC는 각각 월화극 <왕과 나>, <이산-정조대왕>를 편성하면서 사극 전성시대를 주도하고 있다. 그런데 두 드라마는 제목부터 파격적이다.

<왕과 나>는 왕을 ‘나’와 동격으로 보고 있다. 조선 국왕은 주인공인 내시 김처선과 동급일 뿐 아니라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시청자들과 같은 눈높이다. 그리하여 훗날 성종이 될 자을산군은 내시와 옷을 바꿔 입고 저잣거리로 나가고, 내시가 될 김처선은 곤룡포를 입고 잠시나마 왕 행세를 한다.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 식의 옷 바꿔 입기는 얼핏 낭만적인 에피소드처럼 보이지만, 개연성을 따지자면 하늘과 땅이 뒤집힐 일이다. 2007년의 사극에서 조선의 왕은 한낱 ‘의상’으로만 남은 셈이다.



	▲ MBC 월화드라마 <이산> 포스터

<이산>은 제목만으로도 놀라움 그 자체다. 이산(李?), 그 낯선 이름이 조선 22대왕 정조의 휘라는 사실을 <이산> 방영 전에 아는 이가 얼마나 됐을까? 조선의 르네상스를 불러온 대왕을 감히 ‘이름’으로 말한다는 기획의도부터가 파격이다. 왕의 이름은 부르기 위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 아무도 이름을 부르거나 쓸 수 없도록 새로 글자를 만들어 작명하곤 했다는 사실은 무시된다. 매회 힘주어 ‘이산’이라고 지칭하는 연출의 의도는 세손(이서진 분)을 그저 외롭고 힘 없는 한 개인으로 보이게 한다.

한낱 ‘보통사람’이 된 왕들은 일찌감치 어린 시절에 운명적 사랑을 만난다. <왕과 나>와 <이산>은 우연히 백성들이 사는 세상에 구경 갔다가 만난 여자아이를 평생 못 잊고 사랑한다. 게다가 ‘왕의 여자’들에게는 하나같이 따로 ‘정인(情人)’이 있다. <왕과 나>는 내시 김처선(오만석 분)을, <이산>은 시정잡배 대수(이종수 분)를 감히 왕의 연적으로 두었다.

그러나 열 살 남짓에 결정된 첫사랑과 우정은 왕의 인간관계나 행동반경을 사정없이 좁혀 버리고 말았다. 위대한 대왕들께서 2007년의 사극에서는 로맨스와 인간미에 발목이 잡혀 ‘근정(謹政’)‘은 커녕 소소한 개인사로 입방아만 찧고 계신 이유다.

심지어 왕실 어른들까지 ‘보통사람’만도 못한 대접을 아무렇지도 않게 감내한다. 일례로 <왕과 나>에서는 대왕대비(양미경 분)를 알현하러 갔던 인수대비(전인화 분)는 갑자기 판내시부사 조치겸(전광렬 분)이 문안 오자 방석에서 일어나 뒤로 물러난다. 곧이어 대비가 앉으셨던 방석에 일개 내시가 주저 앉는다. 무엄하게도 대비와 내시를 한 방석에 앉히다니! 이는 단지 고증 부족이 아니라 조선왕조의 격을 떨어뜨리는 행위다. 사극에 임하는 제작진의 무성의를 대변하는 사례다.



	▲ 김원 문화평론가

MBC <이산>에서 세손의 눈높이는 거의 언제나 신하들이나 다른 ‘백성’들과 같은 높이에서 카메라에 잡힌다. 현재 국왕인 영조(이순재 분)의 눈높이는 희한하게도 세손보다 아래인 경우가 많다. 이유는 단 하나, 세손이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아니다. 실은 의도적인 ‘연출’의 결과가 아니라 단지 배우 이순재가 배우 이서진보다 키가 작은 데서 오는 물리적인 이유인 듯 싶다. 감히 국왕과 세손과 신하를 같은 프레임으로 잡는 플랫 하고 상투적인 카메라의 문제다. 만일 연출 의도가 있다면, 조선 왕조를 작정하고 능멸하려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국왕의 인간미를 드러낸다는 기획의도를 살리려면 역설적으로 왕의 위엄이 살아야 한다. 현재 왕보다 왕의 ‘연적’과 ‘정적’들이 더 판을 치고 돋보이는 두 드라마의 딜레마다.

외부 필자의 칼럼은 필자 개인의 의견으로 본 사이트의 편집 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김원 문화평론가

2007-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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