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꺾인 '개혁'에 대한 향수, 혹은 현실정치 반영?
가히 '정조(正祖) 열풍'이다. 올들어 조선시대 22대 국왕 정조(1752~1800)를 다룬 드라마가 3편이나 방영됐거나 방영되고 있고,
출판가에서도 정조를 다룬 인문역사서와 소설이 봇물터지듯 쏟아지고 있다. 왜 정조 열풍이 부는가? 그리고 현재의 시점에서 정조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사극 열풍에 서적도 인기=지난 여름 KBS의 '한성별곡-정'이 포문을 열었다. MBC '이산'은 지난 9월부터 전파를 탔고, 지난달
17일부터 케이블 채널 CGV를 통해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이 방영되고 있다. 정조를 주인공으로 한 TV 사극 세 편이 브라운관을 비슷한
시기에 장식하는 이례적인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정조암살미스터리 8일'은 정조의 8일간 화성행차 일정을 배경으로 개혁파와 수구파의
대립을 다룬 미스터리 장르의 퓨전사극이다.
세 드라마에서 정조는 자신의 이상을 펼치려 하지만 보수적인 신하들에 가로막혀 꿈을 이루지 못하는 군주로 나온다.
올 들어 정조 관련 서적도 예년에 비해 많이 쏟아지고 있다. 올해 초판된 인문·역사서로는 '정조-조선의 혼이 지다'(이한우/해냄), '이산
정조대왕-조선의 이노베이터'(이상각/추수밭) 등이 있다. '이산 정조대왕'(강신재/행림출판), '정조대왕 이산'(이상우/로크미디어), '이산과
음모'(여설하/생각하는 책), '정조 이산 찬란한 나라'(손양희/보성출판사) 등 지난 9월부터 신간 소설도 쏟아지고 있다.
정조를 바라보는 시각들은 다양하다. 붕당정치를 해소하고 조선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이룩한 개혁 군주로 보거나 개인적 행·불행을 국가적
문제로 확대한 비운의 군주 등 다채로운 스펙트럼으로 정조를 바라본다.
박현주 동보서적 책소식 편집장은 "정조 관련 서적을 찾는 사람들이 꾸준하게 늘고 있다"며 "TV 드라마 열풍, 대선을 앞둔 정치 상황과
맞물렸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왜 정조 열풍인가=정조 때는 한국사에서 개혁과 보수 세력의 갈등이 최고조에 달했던 시기. 정조 재위 기간이었던 1776년부터
1800년까지 24년은 사회 전반에 급격한 변동이 일어나 조선을 지탱해왔던 제반 구조가 크게 동요됐던 시기. 농업과 상업의 발달로 농민과
중인들의 경제적 지위가 상승되면서 신분제의 동요, 서민문화와 실학의 대두 등 새로운 양상이 벌어졌다. 토지를 중심으로 한 기존 양반지배질서가
아래로부터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김성윤 경북대 사학과 교수의 말. "정조 전만 해도 지주세력의 생산력이 국익의 전부를 좌우하는 중세사회적 체제를 유지했다. 하지만 새로운
부가 창출되면서 조선이 탈중세로 전환되는 시점이었는데 정조대의 보수-혁신 구도는 탈중세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적 갈등이었다."
정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 것은 무엇보다도 현재의 정치적 상황과 절묘하게 중첩되기 때문이다.
△"단선적이지 않다"=그러나 정조를 보는 시각은 이중적이다. 최근 이례적으로 정조를 실패한 군주로 비판하는 시각도 돌출되고 있다. 이런
시각에는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가장 개혁적이며 한때 정조에 비견되었던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의 기대에 호응하고 있지 못하다는 입장이 들어 있다.
개인적으로 똑똑하고 출중한 능력을 지녔지만, 자신의 정치적 비전을 실현시키지 못한 정조의 치세에 노 정권의 모습을 미묘하게 투영시키고 있는
것이다.
'정조-조선의 혼이 지다'의 저자 이한우는 이렇게 말한다. "정조는 비극적 성장과정으로 포용의 정치보다 불신의 정치로 나아갔다. 실록을
들여다보면 정조가 바로 세도정치의 문을 연 장본인이다. 국가라는 공적 기구를 자기화하지 못하고 사적인 기구 설치를 통해 공적 기구를 통제하려
했다. 그것은 결국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그 바람에 세도정치의 폐단이 열렸다." 이는 보수주의의 대표적 관점이다.
다산연구소 김태희 기획실장은 다른 관점에서 정조를 비판적으로 본다. "천주교 신앙, 서학, 북학 등은 정조의 문예부흥정책에 힘입은
것들이다. 그런데 정조는 당시 주류적 정파였던 노론계 인물을 겨냥해 문체반정을 내걸었다. 자유분방한 글쓰기를 중단하고 순정한 문장을 쓸 것을
요구했다. 정조가 시행한 천주교 금단과 문체반정은 자신이 펼친 문예부흥정책의 내용과 성과를 부정하는 것이었다." 자기부정이 개혁의 좌절을
가져왔다는 말이다. 결국 정조 사후 부패한 세도정치와 피의 민란으로 얼룩진 시대로 이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정조를 대단한 군주로 여전히 조명하는 시각이 많다. 대선을 앞두고 이상적인 지도자를 바라는 대중의 심리도 정조 열풍에 한몫하고
있다. 좌파와 우파의 갈등, 신세대와 기성세대의 불화, 양극화 문제 등을 해소할 수 있는 지도자의 모습을 정조로부터 찾으려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정조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이다.
하지만 그 전통적 시각에 균열이 지금 생기고 있는 것이다. 정조를 보는 미묘하게 상반된 시각이 우리 시대 심부의 복합적 모습이다.
김상훈기자 neato@busanilbo.com
2007-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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