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궁’의 의미와 변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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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방극장이 사극 열풍이다. MBC `이산` MBC `태왕사신기` SBS `왕과 나` KBS1 `대조영`과 CGV의 초대형 사극 `정조암살미스터리-8일` 등 지상파와 케이블채널은 거의 일주일 내내 사극을 방영하거나 방영했다. 내년에도 KBS1 ‘대왕 세종’ KBS2 ‘쾌도 홍길동’, MBC ‘선덕여왕’을 방영하며, SBS도 낙랑공주의 언니로 실제 인물인 자명의 이야기를 다루는 ‘왕녀 자명고’와 ‘제중원’을 준비하고 있는 등 사극 열기는 이어진다. 현재 역사 드라마는 `대세`라는 표현이 잘 어울린다. `인순이는 예쁘다` 등 잘 만든 현대물들이 사극의 틈새에서 시청률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을 정도다.

<궁, 권위의 상징에서 친근함으로>

사극들이 안방극장에 깊숙이 침투하면서 사극의 주 무대가 되는 `궁`도 대중들에게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원래 일반인들에게 `궁`은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자 선망과 부러움의 공간이었다. 높은 담으로 둘러싸인 성역으로 인식됐다. 궁의 주인인 왕은 그 안에서 마음껏 권력을 행사했다.

MBC `조선왕조 500년`이나 SBS `여인천하` KBS `용의 눈물` KBS `태조 왕건`때만 해도 왕들은 궁 안에서 왕권을 강화시켜나갔다. 경복궁의 중심인 근정전에 왕이 앉아있고 문무백관들이 도열해 있는 드라마 속 모습에서 권위적이고 위엄을 갖춘 궁의 이미지는 더욱 강화돼 나갔다. 말하자면 궁은 권위의 상징이었다. 궁에 있는 왕과 대신, 내시, 상궁 들은 거의 궁 밖을 나오지 않는다. 가뭄에 콩 나듯이 왕이 민심을 알아보기 위해 행차를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이는 궁이 고스란히 밖으로 옮겨진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궁 안과 궁 밖은 서로 완전히 단절된 공간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사극들에서 보여지는 궁의 의미는 다르게 느껴진다. 궁은 이제 쉽게 밖으로 나왔다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됐다. 이는 `대장금` 이후 사극에서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대장금`에서 술 제조의 대가인 덕구(임현식)는 장금(이영애)을 끝까지 도와주며 궁 안과 궁 밖을 이어주며, 막강한 부(富)를 배경으로 권세를 부리는 코믹 캐릭터 최판술(이희도)도 수라간을 왔다 갔다 하면서 궁 안과 궁 밖 사이의 이야기 고리를 만들어낸다.

`이산`에서 세손인 이산(이서진)은 어린 시절 궁 안에서 궁 밖의 아이들인 성송연(한지민)과 박대수(이종수)와 알게 된 후 이 인연을 끝까지 맺어가며, `왕과 나`에서도 성종(고주원)은 왕이 되기 전인 어린 시절, 궁 밖에서 윤소화(구혜선)와 주변 인물들을 알게 된다.사극에서 왕이 궁 밖으로 쉽게 나올 수 있는 상황이 되자 시청자에게 궁은 훨씬 친숙한 이미지로 다가왔다.

궁은 친근한 이미지를 너머 측은하고 힘든 공간으로까지 여겨지기도 한다. `화려한 감옥`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궁의 권위가 해체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이처럼 궁에 대한 생각이 바뀌고 있는 것은 좁게는 궁의 주인인 왕에 대한 이미지가 바뀌는데 기인하고 있고, 넓게는 사극을 보는 시점이 변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궁 밖의 궁을 꿈꾸다>

최근 사극들에서 비쳐지는 왕들은 궁속에서 권력의 탄력을 받는 존재가 아니다. 궁에 갇혀있는 꼴인 왕, 궁 밖으로 탈출하려고 하는 왕도 있다. 궁 내부에서는 왕을 음해하는 세력들로 넘쳐난다. 오히려 왕이 백성(서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왕과 나`에서 성종은 조선시대 문물을 처음으로 정비한 왕이건만 후궁들의 `여인천하`가 득세하는 궁속에서 외로움과 답답함을 안고 산다. `한성별곡-正`은 인물들이 얽히고 설킨 살인사건과 신분관계 속에서의 고뇌하는 정조가 좌절한 왕으로 그려진다. 영화 ‘왕의 남자’에서도 연산군에게 궁은 부담스럽고 탈출하고 싶은 공간이다.

`이산`에서도 세손 이산은 11살 때 부친인 사도세자의 죽음을 목격하고는 "궁이 무섭다"고 말한다. 이후에도 항상 정적들(노론)의 계략과 음모에 의해 시련을 맞는다. 이산은 특권층으로서의 왕이 되는 게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왕이 되어야 하는 처지다. 말하자면 `이산`은 궁속의 정조 서바이벌기다. 정조는 대의명분에 매달리는 공적 존재로서의 왕이 아닌, 생존하기 위해 고뇌하는 사적 존재로서의 왕에 가깝다.

<궁, 지배가 아닌 경영의 場으로>

요즘 왕들은 목소리부터가 부드럽다. 호통형이 아니다. `이산`에서 낮게 깔리는 이서진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따뜻하다. 여성들이 보면 `완소남` 세손이라 할만하다. `태왕사신기`에서도 `쥬신의 왕` 담덕(배용준)은 부드럽고 여성적이기는 마찬가지다. 얼굴에는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다. 백제의 관미성 전투를 지휘하는 담덕의 모습은 호탕하기는 커녕 부드러움 그 자체다. 백성을 위하는 방식도 바뀌었다. 담덕은 관미성 전투에 앞서 "목숨 바쳐 죽어버리는 군사는 필요 없다. 어떻게든 살아있어야 한다."고 명령한다.

최근 사극 속 왕들의 새로운 모습을 이렇게 길게 설명한 것은 왕의 이미지 변화가 궁에 대한 시청자 생각의 변화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독재자형의 절대군주보다는 합리적인 CEO로서의 왕을 원하고 있는 대중심리를 읽은 것으로 해석된다. 그래서 궁은 점점 일반인들이 가까이 갈 수 있는 공간으로 변화하고 있다.

요즘 사극들은 등장인물의 인간적 고뇌를 그리는 게 추세다. 그래서 겉 모습의 권위를 벗겨내고 점점 내면속으로 들어가는 작업이 이뤄진다. 왕이나 영웅이 점점 `일반인화(化)`하는 것은 이때문이다. 궁에 사는 왕이 그런 모습으로 바뀐다면 궁의 이미지와 의미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

<유행을 창조하는 궁>

또 하나, 궁의 이미지 수용에 대한 변화에는 미술 등 미학적인 부분을 빼놓을 수 없다. 요즘 사극은 일회성 궁 세트를 짓고 드라마가 끝나면 바로 철거하지 않는다. 과거 드라마 세트장을 실제로 가보면 TV에서 보던 것과 달리 초라한 모습에 실망하기 마련이지만, 수십억원이 투입된 요즘 `궁` 세트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볼거리가 될 만큼 화려하다. 영상미학을 한 단계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다.

드라마 `궁`의 민언옥 감독은 "요즘 젊은이들은 드라마 스토리가 우선이긴 해도 `그림`을 매우 중시한다"고 말한다. `궁`은 현대물에 사극을 입혀 새로운 의상과 테디베어 등의 소품을 배치한 것이 젊은 시청자와 여성 시청자를 늘릴 수 있던 요인으로 작용했다. 여성 시청자라 해서 사극의 정치관계, 권력쟁투와 찬탈의 영웅 판타지를 즐기지 않는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여성 시청자는 남성에 비해 감성에 더 잘 반응한다.

`정조암살미스터리-8일`에는 각 인물을 부각시킬 수 있는 세트와 소품들이 배경그림으로 만들어진다. `태왕사신기`의 국내성 궁들은 너무 멋있다. 관미성의 고목 가득한 처로의 방은 음산한 `새로운 세계`다. 궁이 패셔너블한 공간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다.

<궁의 진화는 계속된다>

궁의 권위가 해체되고 친숙하고 멋있는 공간으로 바뀌는 것은 반가운 현상이다. 이제 사극이 끝나면 궁속의 인물들 의상과 소품 등 스타일이 여성들에게 유행하는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원래 한국적인 것에서 출발한 궁이라는 공간이 새로운 매력을 담아가고 있는 과정이라고 봐야할 것 같다.

서병기 대중문화전문기자(wp@heraldm.com)

2007-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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