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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월 25일 MBC <이산>의 이산(이서진)은 조선의 22대 왕이 된다. 그건 당신이 홍대 부근에 있는
<매거진t> 사무실 옆으로 운하가 흐르는 것을 보는 것만큼이나, 혹은 모든 증거가 있는 범죄자가 무죄가 되는 것보다 더 믿기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이산은 왕이 되기 전까지 정순왕후(김여진)의 세력으로부터 한 달에 한 번 꼴로 새로운 꼬투리로 정치적인 위협에 시달렸고,
분기별로 암살 위협에 시달렸다. 이제 왕이 되니 좀 편해질까. 하지만 이산 씨, 이건 이병훈 감독의 사극이에요.
이산은 왕이 됐고, <이산>은 시청률 30%를 넘나들며 최고의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러나 바로 이 순간, 이병훈 감독은
이산만큼이나 고민스러운 선택을 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병훈 감독은 ‘이병훈 월드’를 벗어날 것인가, 말 것인가. MBC <허준>부터
<이산>까지 이어지는 이병훈 감독의 필모그래피는 곧 ‘승리의 이병훈’의 역사였다. 허준(전광렬)과 장금(이영애)처럼 보잘 것 없는
신분의 인물이 능력만으로 자신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고, 백제의 왕족이었던 서동(조현재)은 숨어사는 반체제 인사들의 마을 주민에서부터 발명가,
책략가, 귀향 떠난 정치범의 인생을 두루 겪어 결국 백제의 왕이 된다. 열악한 환경에 있지만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사람에 대한 사랑과
능력만으로 자기 분야의 최고에 오르는 것은 이병훈 감독의 일관된 이야기 구조다. <이산>에서도 이산은 세자이긴 하지만, 노론 세력에
시달리는 약자다.
이산, ‘이병훈 월드’를 흔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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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종전의 이병훈 드라마였다면 이산이 왕위에 오르는 것으로 끝났겠지만 진짜
이야기는 지금부터다. | |
그러나 왕이 된 이산은 다르다. 허준이 조선 최고의 의원이 되면 <허준>은 끝난다. 하지만 단지 왕이 되는 것을 넘어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고 공언한 이산은 왕이 되면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병훈 감독은 더 이상 계란이 바위를 깨는 쾌감만 줄 수 없다. 그는
지금부터 착하고 능력 좋은 것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현실 정치를 보여줘야 한다. 이산의 할아버지 영조(이순재)는 정치가 백성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라고 말했지만, 그 말을 했던 영조조차 현실에서는 노론 세력의 전횡을 완전히 막지 못했다. 이미 이산은 자신이 원하는 개혁을 대가로 노론의
리더 최석주(조경환)와 노론의 비리를 덮어주는 협상을 벌인다.
이산이 승패가 불분명한 현실 정치의 세계로 발을 들이는 것은 ‘이병훈 월드’의 근본적인 룰을 흔드는 것이다. 이병훈 감독의 사극에서
주인공의 승리란 곧 그가 끌어 모은 주변 사람들의 승리다. 스머프 마을이 유지되기 위해서는 각각의 능력을 갖춘 스머프가 필요하듯, 이병훈 감독의
사극에는 주인공에게 필요한 능력을 가진 캐릭터가 있어야 한다. 허준이 의술을 배우기 위해서는 유의태(이순재)같은 ‘스승’이 있어야 하고,
장금이가 요리경합을 하려면 왕처럼 “맛있구나”라며 공정하게 경합을 판가름해줄 ‘심판관’이 있어야 한다. <허준>과
<이산>에서 최석주가 악인이지만 당당한 배포도 가진 캐릭터로 등장하고, 이순재가 ‘스승’ 역할을 하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이미지가
이병훈 감독이 생각하는 분명한 캐릭터의 이미지에 어울리기 때문이다. 심지어 주인공도 해야 할 역할이 있다. <이산>에서 이산은 다양한
인연을 통해 은거한 각 분야의 고수들을 끌어들이는 ‘카드캡터’다.그래서 이병훈 감독의 사극은 주인공이 승부를 펼칠 때와 그렇지 않을 때로
이야기가 나눠지고, 그 때마다 캐릭터는 전혀 다른 장르를 연기한다. <이산>에서 대수(이종수)는 이산을 지키는 동안은 온 몸을
내던지는 액션 히어로가 된다. 하지만 이산에게 위기가 없을 때의 대수는 머리가 나빠 익위사 시험에도 낙방해 홍국영(한상진)의 핀잔을 듣거나,
자신의 삼촌과 해프닝을 연출하는 시트콤의 주인공이 된다.
이병훈 드라마=전문직 사극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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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장금>에 비해 허술했던 <서동요>의 비주얼은 작품
자체에 대한 시청자들의 몰입을 방해했다. | |
그래서 이병훈 감독의 사극은 거대하지만 단순하다. 다양한 역할을 가진 수많은 캐릭터가 등장해 한 작품 안에서 다양한 장르를 보여주지만, 그
중심에는 주인공의 위기-승부-결과라는 단순한 구성이 자리잡고 있다. 이병훈 감독의 사극은 최소 50부작 이상의 대하사극의 규모를 가졌지만,
동시에 스토리의 호흡이 가장 짧은 사극이기도 했다. <서동요>에서 서동은 부여선(김영호)에 의해 섬에 유배된다. 그러나 그 다음 주에
서동은 또다시 ‘아이디어’를 내놓아 위기에서 탈출한다. 마치 시트콤이 새로운 에피소드가 시작되면 그 전의 에피소드는 잊혀지듯, 이병훈 감독의
사극은 1~2주 사이마다 매번 새로운 사건을 가져오고, 승부를 벌이며, 한 달이나 두 달에 1회 정도 ‘휴식’을 가진 뒤 새로운 대결을 한다.
사극 안에서 캐릭터를 바탕에 둔 롤플레잉 게임과 시트콤을 동시에 구현하는 이병훈 감독의 연출 스타일은 이병훈 감독에게 드라마 감독이 쉽게 맛볼
수 없는 영광을 가져다주었다. 착한 사람이 언제나 승리하고, 무엇이든 주인공과 악역의 운명을 건 승부가 되는 이병훈 감독의 게임의 법칙은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병훈 감독의 사극은 그만큼 시청자들에게 기존 사극과 전혀 다른 재미를 주었다. 시청자들은 언제 어느 때나 TV를
틀어도 장금이가 악인에게 승리하는 것을 볼 수 있었고, 악인을 제외한 모든 캐릭터가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멜로드라마와 시트콤을 동시에 볼 수
있었다. <허준>부터 <이산>까지 거친 지금 그의 스타일은 정형화된 듯 보이지만, 그의 스토리 구성 방식은 과거의 국내
드라마에 비하면 오히려 새로웠다.
물론 대책 없는 해피엔딩은 비현실적이다. 그러나 이병훈 감독은 사극의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전문직 드라마’의 전문가다.
<이산>에서 영조가 등장하자마자 나라 살림에 대한 세세한 수치를 제시해 신하의 기를 죽이듯, 이병훈 감독의 작품에는 늘 전문 분야에서
뽑아낸 디테일한 이야기가 시청자의 흥미를 돋운다. <허준>의 한의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이, <이산>의 그림에 대한 이야기가
시청자를 드라마에 몰입하게 만든다. 그래서 이병훈 감독의 작품은 스토리 못지않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병훈 감독이 <대장금>에
대해 “우리나라의 미를 담아내고 싶었다”고 한 것은 그의 작품에 대한 특징을 집약한다. 영상이 실제 그 시절의 디테일을 담아낼 정도로
아름다울수록, 이병훈 감독의 작품은 시청자에게 깊은 몰입감을 선사한다. SBS <서동요>가 전작 <대장금>만큼의 반향을
얻지 못한 데는 시청자들이 ‘옥의 티’를 찾느라 드라마에 몰입하기 쉽지 않았던 허술한 세트에도 책임이 있다.
모두가 아는 이야기 구조, 방해받는 몰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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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허준> 이후로 너무나 확고해진 이병훈 감독 특유의 스타일 또한
드라마에 대한 몰입을 방해한다. | |
그 몰입감을 통해 시청자들은 현실이 아닌 현실에 대한 희망을 발견한다. 어떤 시청자도 현실에서 장금이 같은 성공 스토리가 쉽게 가능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착한 사람이 사람들의 도움과 전문적인 지식을 쌓으며 성공하는 이야기는 시청자들에게 현실의 장금이, 현실의
이산을 찾게 한다. 시청자들은 <허준> 방영 당시 일어난 의사들의 분쟁에 대해 “허준 같은 의사는 없냐”며 혀를 찼고, 노론 세력의
정경유착에서는 삼성 비자금 사건을 유추한다. 그래서 이병훈 감독은 가장 대중적이고, 동시에 비판에서도 가장 자유로운 감독이 됐다. 궁중의 음습한
권력 암투대신 착한 사람이 성공하는데 재미있기까지 한 드라마가 나온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매뉴얼을 만들 수 있을 정도로 확고해진 이병훈 감독의 스타일은 점점 패턴화되고, 그것은 시청자들의 몰입을 방해한다. 시청자는
송연이가 도화서 화원이 되는 성장담에 장금이의 성공기를 대입하고, 지상렬이나 이희도의 캐릭터에서 임현식을 떠올린다. 특히 어떤 위기에서도 힘과
의지를 가지고 극복하는 주인공의 성공담은 시청자들에게 대리만족과 동시에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주인공이 1주일에 한 번씩 고민하고 승리하는
이야기를 30번쯤 반복했을 때, 주인공은 이미 ‘인간’이 아니라 ‘사건 해결 기계’가 돼 버린다. 장금이가 요리나 의술 문제 이외의 다른 사적인
문제로 고민하거나, 민정호(지진희)가 장금을 도와주는 것 외에 다른 모습이 있을 거라는 상상은 쉽게 들지 않는다. <대장금>은 이병훈
감독의 드라마 중 ‘이병훈 월드’의 매력이 가장 잘 살아난 작품이었지만, 동시에 캐릭터의 미션 수행만으로는 더 이상을 보여줄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했다. <대장금>에서 장금은 전염병으로 고생하는 백성들을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그들은 장금의 문제 해결을 위한 도구에
가깝게 사용된다. 그들의 불쌍한 모습이 한 번 ‘지나가고’나면, <대장금>에서 백성을 대표하는 것은 다시 강덕구처럼 늘 웃기기만 하는
캐릭터다. 주인공은 힘든 사람들을 위해 살겠다고 하지만, 주인공 주변에서 힘든 사람은 없다. 오히려 늘 좌충우돌하는 주인공이 가장 힘든
처지다.
조금 다르고, 조금 더 넓어진 ‘이병훈 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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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전의 이병훈 드라마에서 보지 못했던 캐릭터인 <이산>의
홍국영(사진 왼쪽)과 최석주. | |
그래서 <이산>은 이병훈 감독이 반보쯤 자신의 세상 바깥으로 나온 작품일지도 모른다. 어떤 상황에서든 해맑게 웃을 수 있었던
장금과 달리, 이산은 ‘인간적인’ 고뇌를 짊어졌다. 그는 뛰어난 학식과 무예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는 초인적인 인물이지만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
때문에 정신적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나약한 인간이다. 과거 이병훈 감독의 주인공들이 주변인물로부터 “주인공님이라면 해낼거야!”라는 말을 듣는 슈퍼
히어로라면 이산은 주변 사람들이 지켜줘야 할 인물이다. 이는 <이산>이 근본적으로 선악도, 승패도 불분명한 정치를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정치가 그러하듯, 이산이 아무리 노론과의 대결에서 여러 번 승리한다 해도 그가 정국을 장악하지 않는 한 이산의 위기는 사라지지
않고, 그의 고민은 계속 된다. 이 끊임없는 정치 투쟁은 <이산>의 호흡이 과거보다 더욱 길어지도록 만들었고, 에피소드와 에피소드
사이가 자연스럽게 연결되도록 한다.
장금이가 행복해지려면 자신이 자기 분야의 최고 위치에 오르거나, 최상궁(견미리) 세력을 없애면 된다. 하지만 <이산>에서 이산은
왕이 된다 해도 마음 놓기 어렵고, 노론 세력을 모두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이병훈 감독은 현실의 역사에서 고뇌를 가득 안은 인생을 살았을
정조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세계에 현실의 인간과 정치의 고민을 배합했다. <이산>에는 이병훈 감독의 ‘착한 편’ 중 처음으로
‘협잡’이 가능한 홍국영이 등장했고, 이산은 친위부대인 익위사를 장악하는 것부터 최석주와의 협상까지 다양한 영역에서 정치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
그것은 마치 도덕에서 사회로 전공 교과서를 바꾼 것과 같다. 그리고 이제 이산은 ‘정치 잘하기 시합’대신 자신의 숙적 정순왕후와 공존해야 한다.
이병훈 감독은 조금 다르고, 조금 더 넓어진 자신의 세계에서 또 한 번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글) 강명석 (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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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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