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병훈 월드를 관통하는 캐릭터 유형

<허준>, <대장금>, <이산>. 이병훈 사극은 대부분 주인공의 이름을 제목으로 삼는다. 이는 이병훈 사극이 지향하는 바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다. 모든 드라마들이 주인공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지만, 유독 이병훈 사극은 이들에게 집중한다. 아무 것도 내세울 것 없는 주인공들이 타고난 재능(의술, 미각)과 성품으로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뛰어난 업적을 이루게 되는 것이 이병훈 사극의 기본 골격이다. <허준>에서 천첩 태생의 신분으로 태어나 밀거래나 하던 날건달 허준은 스승 유의태와의 만남을 거치며 결국 조선시대 최고의 명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대장금>의 장금 역시 백정마을에서 태어나 어릴 적에 부모를 여의었지만, 결국 조선 역사상 여자로서는 처음으로 임금의 주치의가 되고 ‘대장금’으로까지 불리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이산>에 와서는 조금 달라진다. 주인공이 평범한 백성이 아닌 세손이 되면서 전작의 주인공들처럼 스스로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이산은 그 지위 자체로 인해 이들보다 좀 더 많은 주위 사람들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병훈 사극의 주인공들도 여느 드라마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멜로 라인을 갖는다. 그러나 사극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몰라도 이들이 주고받는 감정의 온도는 그리 뜨겁지 않고 은근하다. <허준>에서 허준과 예진아씨는 서로에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지만 허준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고, 두 사람은 서로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 채 애틋한 마음만 삭였다. <대장금>에서 장금과 민정호의 관계는 조금 더 진전한다. 단도를 맞고 쓰러진 민정호를 장금이 구해주면서 인연을 맺게 된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민정호를 사모해 온 금영과 장금을 좋아하게 된 중종의 질투로 어려움을 겪기도 하지만 결국 가정을 이루고 딸 소헌을 낳게 된다. <이산>에서 이산과 송연은 어릴 적 우연한 계기로 만나 동무가 된다. 이 감정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만났을 때도 여전했다. 그러나 세손이 송연을 아끼는 마음이, 그리고 송연이 세손을 위하는 마음이 단지 동무의 그것이 아님은 주위 사람들(효의왕후, 혜경궁 홍씨)이 먼저 알아차린다. 이에 송연은 혜경궁 홍씨에 의해 멀리 청나라로 보내지고 죽을 고비를 맞는 등 어려움을 겪지만, 이 과정을 통해 이산은 송연에 대한 감정이 비단 동무로서의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물론, 이산이 송연을 두고 동무 타령을 할 때도 우리는 모두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병훈 사극은 재능은 있으나 아직은 미숙하고 불완전한 주인공들이 훌륭한 스승을 만나 성장하는 성장 드라마이기도 하다. 허준에게는 유의태가, 장금에게는 한상궁이, 이산에게는 영조가 있었다. 천첩 출신으로 날건달 생활을 하던 허준은 유의태를 만나지 못했다면 최고의 명의가 될 수 없었다. 유의태는 허준에게 약재를 달일 물에서부터 약초 하나에도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는 기본 정신, 아무리 중대하고 급한 일이 있어도 눈앞의 환자를 모른 척 해서는 안 된다는 마음가짐을 가르쳤음은 물론, 허준이 자신의 시신을 해부하여 인체를 공부하도록 하기위해 자살까지 한다. 장금에게 한상궁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 두 사람은 몰랐지만 장금은 한상궁이 수랏간 나인 시절 절친했던 박나인의 딸이었다. 대대로 수랏간 큰상궁인 최상궁과 그녀의 조카이자 최고상궁을 배출한 집안의 딸인 금영, 그리고 수랏간 나인들의 견제와 시기로 고난을 겪는 장금에게 한상궁은 때로는 어머니로, 때로는 엄한 스승으로 장금이 궁중 최고의 요리사가 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산>에서는 영조가 그 역할을 했다. 영조는 이산에게 정치의 의미와 군주의 현명함을 가르쳤다. 영조는 제 손으로 죽음에 이르게 한 사도세자의 아들이자 자신의 손자인 이산에게 애틋한 마음을 갖고 있었고 사랑했지만 그럴수록 더욱 잔인하게 임금 자질을 테스트하며 제왕학을 가르친다.

이병훈 사극에서 주인공의 라이벌은 늘 주인공보다 많은 것을 가졌지만 가장 중요한 재능과 성품이 부족해 주인공을 질투하는 인물로 그려졌다. 이런 모차르트 대 살리에르 식 구도는 뻔하디 뻔한 것이었지만, 이런 뻔함이 이병훈 사극이 대중적인 사랑을 받은 이유이기도 하다. <허준>에서 유도지는 허준의 스승이자 뛰어난 의관인 유의태의 아들로 태어나 허준보다 먼저 취재시험에 급제하여 의관이 된다. 그러나 과거를 포기하면서까지 눈앞의 환자를 먼저 생각한 허준과 같은 마음이 유도지에게는 없었다. 이러한 차이는 아버지 유의태는 물론 유도지가 연모했던 예진까지 유도지가 아닌 허준에게 마음이 기울게 했다. <대장금> 금영 역시 대대로 수랏간 최고상궁을 배출한 최씨 집안의 딸이었다. 이런 금영에게 자신보다 더 뛰어난 재능을 가진 장금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흠모해 왔던 민정호마저 장금에게 마음을 주니 장금을 괴롭히는 금영의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그러나 <이산>에서 이산과 정순왕후의 관계는 이들과 조금 다르다. 정순왕후가 이산과 대립각을 세웠던 것은 이산의 지위와 그로 인한 자신의 안위 때문이었다. 이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무리들 중 한 명이었던 정순왕후는 그 후환이 두려워 이산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주인공에게 고난이 주어지고 그들이 이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며 성장하는 구조를 취하는 이병훈 사극에서 주인공의 라이벌만큼 중요한 이들이 바로 주인공을 돕는 주변 사람들이다. <허준>에서 예진은 허준을 평생 마음에 품고 그가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정신적 위안을 주며 도왔다. 그리고 장금이 생각시 때부터 사귀어온 가장 친한 친구였던 연생은 우연히 중종의 눈에 들어 승은을 입고 후궁이 되어 장금이 위기를 겪자 도움을 준다. 한편, 명색이 세손이지만 허준이나 장금과 달리 스스로 어려움을 헤쳐 나갈 특별한 재주가 없는 이산에게는 전작들보다 더 많은 조력자가 필요하다. 어린 시절 우연히 이산과 만나 동무의 연을 맺게 된 송연과 대수는 그때부터 평생 이산을 곁에서 지켜 주리라 결심한다. 송연은 백우포가 사라져 사신단과의 교역협상에 어려움이 생긴 이산에게 황우포를 백우포로 염색하는 방법을 알려주어 위기를 모면하기도 한다. 무엇보다 송연과 대수의 존재는 어려서부터 온통 적에게 둘러 싸여 살아온 이산에게 평생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진정한 친구이자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 준다. 한편, 홍국영은 좀 더 실질적으로 이산을 도우며 오른팔 노릇을 한다. 세손의 자리를 노리는 이들은 끊임없이 정치 공작을 펴며 이산을 곤경에 빠뜨리고 영리하고 배포가 큰 홍국영은 기지를 발휘해 이산을 보호한다. 이들이 없었다면 오지랖 넓은 이병훈 사극의 주인공들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병훈 사극에서 주인공을 괴롭히는 것은 비단 라이벌들뿐만이 아니다. 이들보다 더 악랄하게 주인공을 괴롭히며 악역을 자처한 이들이 있었다. <허준>에서 허준은 우여곡절 끝에 내의원에 급제한 뒤 한양 내의원에서 어의 양예수를 만난다. 과거 유의태와 침술대결을 벌였다가 패한 뒤 원수지간이 된 양예수는 허준이 유의태의 제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갖은 박해와 방해 공작을 일삼는다. 양예수 일당의 모함으로 허준은 근무지 이탈, 도둑 누명 등 온갖 고통을 겪는다. <대장금>의 최상궁도 마찬가지다. 장금의 어머니 박나인에게 누명을 씌워 죽이려 했던 최상궁은 자신의 조카이자 가문의 명예를 이어갈 금영에게 장금이 걸림돌이 되자 그녀에게도 누명을 씌운다. 최상궁은 중종이 쓰러진 원인이 장금과 한상궁이 만든 유황오리에 있다는 모함을 하며 두 사람이 옥에 갇히게 만든다. <이산>에서는 이산의 고모인 화완옹주와 그녀가 이산을 대신해 왕위로 올리려 한 그녀의 양자, 정후겸이 악역으로 활약한다. 화완옹주는 영조의 딸로 정순왕후와 마찬가지로 사도세자를 죽게 한 장본인 중 한 사람이다. 역시 후환이 두려웠던 그녀는 영조의 총애를 이용해 이산을 음해하거나 암살하려 한다. 하지만 말이 악역이지, 늘상 착한 얼굴을 하고 입바른 말을 하며 때로는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입히는 주인공들보다 스스로의 욕망에 솔직한 이들이 더 인간답게 보일 때도 많았다.

이병훈 사극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재미 중 하나가 극에 활력소를 불어 넣는 임오근 같은 캐릭터들이다. <허준>의 임오근, <대장금>의 강덕구, 그리고 <이산>의 박달호와 이천은 주인공들과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고 그들의 고난이나 성장에 도움이 되거나 걸림돌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극 중 그 어느 인물들보다 강한 임팩트를 남기는 것은 이들이다. 이야기 전개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치는 부분은 크지 않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다분히 단선적인 이야기 구조를 가지고 예상 가능하게 전개되는 이병훈 사극은 상당히 무미건조했을 것이다. “홍! 춘이”, “줄을 서시오.”와 같이 <허준> 최고의 명대사를 남긴 임오근이나 도화서 화원이지만 스스로 “춘화계의 천재, 춘화계의 솔거”라 말하는 이천, 그리고 주모 막선에게 연정을 품지만 내시 출신인 탓에 맘을 전하지 못해 애태우는 박달호는 모두 극의 활력소이자 긴장해소용 코믹 캐릭터들이다.
(글) 김희주 jyoje@t-fa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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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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