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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교양] 고통받는 외국인들... 한국은 예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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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W에서는(2006년 3월 31일 금요일) 작년 12월에 통과된 ‘애국법’과 9.11 이후 점점 고조되고 있는 반 이민 정서로 고통 받고 있는 수 많은 미국 이민자들에 대해 방송합니다.  미국과 마찬가지로 한국에도 수 많은 외국인 노동자들이 고통을 받고 있는데요 PD수첩과 함께 그 실태를 알아봅니다.

W 홈페이지  I   PD수첩 홈페이지

[PD수첩]
2005년 4월 26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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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기(무료):

우리 엄마는 필리핀

영주시 문수면의 작은 시골 마을, 20년 만에 처음 아이가 태어났다. 동네 사람들의 귀여움을 독차지 하는 이 아이는 한국 아빠와 베트남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이른바 코시안(한국인과 아시아계 외국인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2세). 새로 태어나는 아이는 모두 코시안인 마을도, 아이라고는 오로지 코시안 뿐인 마을도 농촌지역에서는 드물지 않다.

지난해 외국 여성과 결혼한 한국 남성은 2만 5천명, 국제결혼 10% 시대를 방증이라도 하듯, 코시안의 숫자 역시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꿈꾸며 먼 나라로 시집온 국제 결혼 이주 여성들과, 국내에서 신부를 구하지 못해 외국에서 신부감를 데려오는 한국 남성들. 그들이 꾸린 가정은 과연 행복하기만 한 걸까? 그들의 자녀들은 올바르게 성장하고 있는 것인가? 이 전국의 수많은 국제결혼 가정을 직접 찾아가, 국제결혼 가정의 현주소를 긴급 점검한다.

가난을 견디다 못해 정신을 놓은 엄마, 안젤라

필리핀 여성 안젤라는 한국에 시집오면서 말을 잃었다. 큰 기대를 안고 찾아온 한국 땅이었지만, 정작 그녀가 맞닥뜨린 것은 생활 능력이 없는 남편과 나이든 시어머니, 상상치 못했던 극심한 가난뿐이었다. 그녀의 정신은 점차 황폐해졌다. 급기야 정신병원에 입원하기에 이르지만, 안젤라는 제대로 된 치료조차 받지 않고 병원을 뛰쳐나왔다. 그녀는 오늘도 커다란 겨울 점퍼 속에 몸을 감추고 길거리를 헤매고 다닌다.

안젤라를 만나기 위해 나주로 내려간 취재진은 그녀의 어린 딸을 만났다. 몸져 누운 할머니, 무기력한 아버지와 함께 환기도 되지 않아 곰팡내가 진동하는 골방에서 자라고 있는 그녀의 여섯 살배기 딸. 취재진을 붙잡고 놓지 않을만큼 아이는 정에 굶주렸다. 엄마의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의 정서 상태는 우려스러울 정도로 불안했다.

‘며느리’라고 어서 저런 게 들어와서!

메리제인은 얼마 전 아이 셋 중 작은 아이 둘을 데리고 집을 나왔다. 사사건건 간섭을 하고, 걸핏하면 “필리핀으로 돌아가라”며 욕설을 퍼붓는 시어머니를 견디다 못해 쉼터로 피해 온 것이다. 그녀는 지금 이혼을 생각하고 있다. 아이들의 양육권만 얻을 수 있다면 아이들을 먼저 필리핀으로 보내고, 돈을 조금 벌어 하루라도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하지만 메리제인 시어머니의 말을 달랐다. 게으르고 살림 꼼꼼하지 못한 며느리가 시어머니는 내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는 것. 고집 세고 순종적이지 않은 며느리가 시어머니는 못내 불만이었다고.

국제 결혼 가정이 흔들리는 원인 중 하나는, 문화차이에 의한 시부모와 며느리간의 갈등이다. 차이를 인정하지 않고 며느리를 ‘게으르다’ ‘버릇없다’고 윽박지르는 시부모와, 한국의 가족문화를 이해하지 못해 진정한 식구가 되지 못하고 겉도는 이방인 며느리들.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그들이 서로의 거리를 좁힐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엄마 보고 싶어-고통 속에 버려지는 아이들

필리핀 여성 플로렌드는 불법체류자다.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남편은 무능할 뿐 아니라 가혹한 폭력으로 플로렌드를 위협했다. 시부모는 플로렌드가 혹여 도망갈지 모른다며 아이가 5살이 되도록 국적 취득에 동의해주지 않았다. 집을 나와 불안한 삶을 이어가는 그녀에게 집에 두고 온 아들은 가슴을 저리게 하는 고통이자 살아가는 이유다.

엄마와 떨어져 아빠, 할머니 하고만 살고 있는 수민이는 엄마를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 품에 달려들어 안기지도 않는다. 엄마는 수민이의 말을 이해하지도 차분하게 들어주지도 못한다. 필리핀에서 온 엄마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둡고 소극적이던 수민이는 1년 전부터 어린이집을 다니면서 조금씩 밝고 씩씩한 아이로 변했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것이 해결된 것일까? 엄마와의 소통 부족이 불러일으키는 아이의 정서적 불안정, 언어 발달 부진, 학습 장애 등 국제결혼 가정의 아이들이 노출되기 쉬운 위험 요소들을 짚어 봤다.

국제 결혼의 함정, 해결 방법은 없는가?

국제 결혼 가정에서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할 과제는 언어 차이를 극복하는 것. 하지만 우리 사회는 이들의 성공적인 정착을 지원하는 기본적인 시스템조차 갖추지 못하고 있다. 일부 지자체와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이주여성 한글교육’ 등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그나마 반가운 일. 이들이 당당한 한국 사회의 구성원으로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지원해야할 것은 무엇인지 모색한다.

 

[PD수첩]
2004년 10월 26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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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기(무료):

어느 외국인 노동자의 실종-불법체류자 '캄푸'의 귀향

2002년 5월 26일 새벽 4시경, 충남 천안시 성환읍 1번 국도변에서 교통사고 발생. 한 외국인 노동자가 이 사고로 뇌손상을 입고 자신의 신분조차 망각하게 되었다. 유일한 단서는 전화번호 수첩, 이 수첩에는 방글라데시어로 ‘샤밈’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러나 수첩 속 샤밈은 경기도의 모 업체에서 일하는 또 다른 인물이었다!

한 외국인 노동자의 잃어버린 이름 찾기 그리고 가족상봉에 이르기까지... PD수첩은 지난 9월 21일 <엄마 저 여기 있어요 - 어느 외국인 노동자 실종> 편에 이어 2년간 방글라데시인 ‘샤밈’으로 살았던 한 외국인 노동자를 추적했다.

내 이름은 '캄푸'

제작진은 유일한 단서인 수첩에 다시 주목했다. 그리고 수첩의 한 페이지의 글씨체가 다르다는 점을 발견, 번호를 추적했다. 번호는 천안의 한 농장주의 것으로 실제 사용자는 농장주의 부인인 태국인 여인의 것이었다. 부부의 농장은 사고 지점에서 불과 13K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었다. 현재 중국에 머무르고 있는 부부에게 팩스를 통해 사진을 보여줬다.

부인은 그 사진의 주인공이 태국인 노동자 ‘캄푸’라고 했다. ‘캄푸’라는 태국인 노동자가 부부가 경영하는 천안의 농장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것이다. 그는 2002년 4월경부터 약 3주 동안 농장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졌다.

제작진은 농장의 골방에서 ‘캄푸’의 가방을 찾았다. 가방 속에는 ‘캄푸’의 여권 복사본과 사진, 송금용지, 정지된 핸드폰 등이 남아있었다. 가방 속 여권 복사본으로 출입국관리소에 신원을 확인했다. 그 결과, 2년여를 방글라데시인 ‘샤밈’으로 불리던 이 외국인 사나이는 태국인 ‘캄푸’로 밝혀졌다.

왜 신고하지 않았나?

제작진은 ‘캄푸’와 태국에서 함께 왔다는 ‘까이’를 만났다. ‘까이’는 그동안 ‘캄푸’가 살해당했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사고가 났던 날, ‘캄푸’는 친구의 생일잔치가 벌어진 한 공장에 왔다가 새벽 세 시경쯤 나간 후 행방불명이 되었다고 했다. 그런데 당시 생일잔치에 왔던 친구와 싸운 후 나가서 사라졌기 때문에 아마도 살해당했으리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까이’는 사증발급없이 한국으로 온 불법체류자. 때문에 신고할 수 없었다고 고백한다. 농장주는 ‘캄푸’의 친구들에게 행적을 물어봤다고 했는데 신고는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캄푸’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 떠났으리라고 막연히 추측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가방을 제외하고, 농장에 남은 ‘캄푸’의 옷가지 등 소지품은 이미 태워버린 후였다.

제 2의 캄푸, 불법체류자 18만 명

캄푸의 소식을 전하기 위해 제작진은 태국으로 향했다. 캄푸의 고향은 농촌마을, 넝부어람푸. ‘캄푸’는 아버지 ‘누’씨의 일곱 자녀 중 네 번째 아들이었다. ‘캄푸’가 한국으로 오기 위해 진 빚은 30만 바트, 한화로 900만원에 이르는 돈이다. 농사를 짓고 사는 ‘누’씨는 이 빚을 갚기 위해 밭을 절반이나 팔았지만 빚을 다 갚지 못한 상태였다.

취재진은 마을에서 ‘캄푸’를 한국으로 보낸 장본인을 만났다. ‘캄푸’ 외에도 이 마을에서만 ‘까이’를 비롯해 5명을 한국으로 보냈다고 했다. IMF사태가 일어나기 전, 한국에서 불법체류자였던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서 중간 브로커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13만 바트의 소개비를 받고 캄푸를 한국으로 보냈다. 합법적으로 외국에 인력을 송출하는 태국의 송출업체는 100여개. 태국의 ‘맨파워 회사’ 사장은 인터뷰에서 합법적으로 3500여명, 불법적으로 3만여 명의 태국인이 한국으로 갔다고 말했다. 그리고 5만여 명의 태국인이 한국으로 가길 원한다고 덧붙였다.

한국의 불법체류자 약 18만 명. 정부의 강제추방정책의 실시로 약 10만 명까지 줄었으나 E9비자 만기기간이 돌아오면서 현재 18만 명으로 다시 늘어나는 추세다. 이번 주 PD수첩에서는 제2의 ‘캄푸’, 불법체류자 18만명이 도래한 현 시점에서 외국인력정책의 문제점을 진단한다.

 

[PD수첩]
2004년 9월 21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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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기(무료):

어느 외국인 노동자의 실종-엄마 저 여기 있어요

이 외국인 노동자를 아십니까?

2002년 5월 26일 새벽 4시 충남 천안시 성환읍 1번 국도변 갓길, 평상복 차림에 슬리퍼를 신은 한 외국인 노동자가 사고를 당한다. 그는 심한 뇌손상으로 인해 이름도, 나이도, 국적도, 모국어도 잊어버렸다.

목격자도 없는 상황에서 찾은 유일한 단서인 현장에 남아있던 전화번호 수첩에는 방글라데시어로 '샤밈'이라는 이름이 적혀있었다. '샤밈'과 방글라데시인이라는 두 가지 단서를 가지고 주변의 공장을 탐문하고, 다른 외국인 노동자에게도 사진을 보여주며 신원을 파악을 시도했지만, 그 어느 곳에서도 샤밈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수첩의 주인은 따로 있다?

그의 전화번호 수첩에는 서툰 한국어로 '차잔님'이라는 번호와 방글라데시 현지번호가 적혀있었다. 취재진은 방글라데시 현지와'차잔님'이 '샤밈'이 일했던 공장과 관계가 있을 것으로 판단해 전화통화를 시도했다.

그러나 어렵사리 전화연결에 성공한 현지 형수님과 '차잔님'은 '샤밈'이 잘 있다고 했다. 사실 확인을 위해 찾아간 경기도에 있는 D산업에는 또 다른 '샤밈'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없는 이름 '샤밈'

오리무중에 빠진 취재진은 '샤밈'과 '방글라데시인'이라는 틀에서 벗어나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방글라데시인과 비슷한 필리핀, 미얀마인으로 범위를 넓히고 산업연수생으로 입국했다고 가정, 중소기업협동조합을 통해 명단확인 작업을 했다. 동시에 법무부 출입국관리국에 이탈자 조회를 의뢰했고, 경찰청 협조를 받아 지문조회를 시도했다.

'샤밈찾기' 이틀째, 김모씨라고 밝힌 사람으로부터 한 통의 제보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샤밈'이 몇 년 전 자신이 잠깐 알고 지내던 사람과 닮았다고 했다. 정확한 사실 확인을 위해 취재진은 김모씨와 병원에 동행하게 되는데...

'샤밈'을 찾아 나선 길에 만난, 방치된 외국인 노동자들

그 어떤 기록에도 '샤밈'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혹시 그는 관광비자로 들어온 불법체류자였던 것일까? 고용허가제와 산업연수생 등 합법적인 방법이 아닌 관광비자로 들어온 외국인 노동자는 불법체류자라는 '죄'로 인해 죽거나 사고를 당하더라도 파악조차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

정식 비자를 얻어 들어오더라도 일할 수 있게 허가된 3년이라는 짧은 시간은 지금 이 시간에도 외국인 노동자들을 합법의 테두리에서 불법으로 밀어내고 있다.

1천8백 만원의 임금체불로 정신병에 걸린 묘칫 씨와 같은 공장, 같은 기계에 팔이 절단된 두 명의 러시아 노동자. 그리고 빡빡한 삶에 못 이겨 결국 생의 끈을 놓아버린 중국인 노동자. 이들은 이대로 사회의 음지에 방치될 수밖에 없는 것인가?

 

[PD수첩]
2003년 11월 25일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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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보기(무료):

강제추방 12만, 떠난 자와 쫓기는 자

4년 이상 체류자 12만명 강제추방

정부는 내년 8월부터 부분적으로 시행되는 고용허가제의 실시를 앞두고 40만 명에 달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일제 점검과 단속을 시작했다. 4년 이상 국내 체류로 강제추방 대상이 된 외국인 노동자의 수는 총 12만 명.

강제추방 대상자들은 수 십명 혹은 수 백명씩 각지의 외국인 노동자 센터에 모여 농성에 돌입했다. 중국동포 5천여명은 법무부에 ‘국적회복신청서’를 제출하며 단식농성에 들어가기도 했다. 취재결과 상당수의 단속 대상자들은 지방으로 피신하거나 쪽방에 몸을 숨긴 채 단속의 손길이 미치지 않기만을 바라고 있었다.

죽음을 선택한 외국인 노동자들

지난 11월 11일 스리랑카 출신 외국인 노동자 다라카씨가 지하철역 선로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튿날 김포의 한 공장에서도 방글라데시 노동자 비쿠씨가 로프에 목을 매달아 숨졌다.

‘코리안 드림’을 안고 한국 땅을 밟았던 다라카씨는 불법체류 기간 4년이 넘으면서 강제출국 당해야할 처지였으며, 매형과 사촌형제 2명도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스리랑카에서 다라카의 사망 소식을 접한 가족들은 믿을 수 없는 일이라며 취재진을 부여잡고 절규했으며, 시신이 도착하자 넋을 잃었다. 도대체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지 유족들은 취재진에게 반문했다.

스리랑카 현지 브로커가 공개한 입국비용의 실체

지난 2002년 국가인권위에서 조사한 결과 한국에 입국하기 위해 외국인 노동자들은 평균 3,800 달러의 비용을 쓰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스리랑카에서 한국에 들어오기 위해 드는 비용은 연수생의 경우 300 만원 정도 그리고 관광비자로 입국해 불법취업하는 경우 600 - 800 만원 정도가 된다고 경험있는 현지인들은 전했다.

스리랑카에서 어렵게 만난 현지 알선업체 사장 압둘라씨. 그는 극도로 말을 아꼈으나 인터뷰 말미에서 조심스레 한국인들 또한 이 일에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털어 놓았다. 불법체류자의 70%를 차지하고 있는 관광비자, 위조여권 소지자들의 입국이 사실상 한국인 파트너들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관광비자의 경우 홍콩 등을 경유해 한국에 입국하는 루트가 개척되고 있으며, 한국의 제도변화를 주시하고 있다고 속내를 드러냈다.

월 3만원짜리 외국인 연수생

1994년부터 시행해온 외국인 산업연수생 제도는 지난 10 여년간 한국인들이 하기 싫어하는 3D 업종의 인력문제를 해결하는 창구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산업연수생 제도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각종 인권유린 사례로 끊임없이 비판 받아왔다.

산업 연수생이었다가 사업장을 이탈해서 불법체류자가 된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제도의 보완을 요구했다. 연수생 신분이기 때문에 얻게되는 절대적인 저임금으로는 누구라도 불법체류자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해외투자법인 연수생 제도’의 문제점은 훨씬 더 심각했다.

한 섬유회사에서 해외투자연수생으로 일하다 도망쳤다는 타마라씨. 하루 12시간 노동의 대가로 한 달 뒤 그녀가 손에 쥔 돈은 고작 3만원이 전부였다. 그러나 해당 기업은 나머지 임금 20만원은 예금으로 보관하고 있으며, 스리랑카 현지 가족에게 5만원을 주기 때문에 한국법으로는 전혀 문제될 것이 없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산업구조와 낮은 출산률을 고려할 때 노동인구의 부족은 앞으로 점점 부각될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94년 이래 지난 10 년간의 산업연수생 제도는 이제 중대한 기로에 서게 되었으며, 이제 임기응변적이고 근시안적인 연수생 제도가 아니라 보다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외국인력 활용 방안을 서둘러 정비해야할 때라는 것이다. 이번 주 ‘PD 수첩’에서는 외국인노동자 1% 시대, 공존의 해법을 모색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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