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미터 앞에다 두고...

전훈칠 기자 thateye7@imbc.com

박지성이 한국인 최초의 프리미어리거로 재탄생한 것은 박지성 본인에게나 축구팬들에게나 감격과 영광이 버무려진 한국 축구 역사의 기념비적 사건이다.

박지성을 '직업적으로' 따라다녀야 하는 기자들이라고 흥분된 마음 가실리야 없겠지만, 밥줄이 달랑거리는 생존의 문제에 엮이다 보니 근심도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나라마다 취재 여건이 다른 것은 기본인데 로마에 로마법 있듯,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는 아직 생경한 '맨유法'이 있기 때문.

어쨌건 스포츠 뉴스에서 맨유의 일본 투어를 취재하기로 기획됐고, 그 임무는 내게 떨어졌다.
이미 맨유의 홍콩 투어를 다녀왔던 몇몇 선배들로부터 '맨체스터 경기는 취재 여건이 매우 열악하다(물론 순전히 기자 입장에서)'는 소문을 들은 터라 적잖은 긴장감이 일었다.

결전의 날, 맨유의 일본 방문일 7월 27일.

우리 취재진은 당일 오전 일찌감치 도쿄 하네다 공항에 도착해 부랴부랴 두고 온 고국과의 통신 준비를 마친 뒤, (해외 출장 가면 사람 죽고 사는 일이 터지지 않은 다음에야 일단 통신문제부터 해결하는 게 보통이다), 곧바로 맨유가 스쳐지나게 될 도쿄 나리타 공항으로 이동했다.
이미 SKY Sports 등 영국 언론을 비롯해 몇몇 취재진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자리를 잡고 대기 중.

같은 시기에 레알 마드리드가 이미 방문한 까닭인지, 생각보다 맨유를 반기러 온 팬들은 많지 않았고, 그마저도 반니스텔루이나 루니, 긱스 등의 져지가 눈에 띌 뿐, 혹시나 했던 'J.S.Park' 의 이름을 들고 있는 (혹은 입고 있는) 이는 없었다. (너무 큰 바람이었나보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두리번거리다보니 어느새 맨유의 입국 시간은 다가왔고...

"어어~ 나온닷~! 박지성 저기 저기~!"

그리고...

끝이었다.

마치 덤불 속에 또아리튼 뱀이 잠깐 표피를 드러냈다가도 곧바로 어디론가 사라지듯, 공항에서 출국장을 빠져나온 맨유 선수들은 곧장 연결되도록 만들어놓은 그들만의 통로를 이용해 덤불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취재진 중 박지성과 안면이 있는 선배 기자가 박지성을 붙들어보려 했지만, "어~ 어~" 를 서너번 외치는 동안 이미 상황 종료.

계획이 틀어진 취재진은 허탈할 틈도 없이 재빨리 맨유의 다음 일정을 따라 도쿄국립경기장으로 향했다.
말로만 듣던 도쿄의 교통 체증을 실감하고 경기장에 도착한 순간, 한 단계 위의 축지법을 사용한 맨유 선수들은 이미 경기장에서 노닥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가 우리를 가로막고 있었다.
공항에서 맨유 선수들과 취재진을 단절시켰던 띠줄이 다시 한 번 위용을 드러낸 것. 맨유 선수들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 약올리듯 이런 띠줄로 막혀 있었다.
흘러간 유행가 가사마냥, 그야말로 "몇 미터 앞에 두고" 가지 못하는 상황이라고나 할까.

이러다가 인터뷰 자체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했고, 역시 안면이 있는 선배가 먼 거리에서 애타게 박지성을 불러봤지만 맨유법에는 그런 임시방편이 통하지 않았다.
박지성 본인도 이런 취재진이 안타까웠는지 손짓발짓해가며 여기서는 인터뷰가 불가능하다는 의사를 전달해 오니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가시마 앤틀러스와의 경기가 예정된 7월 28일.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박지성이 묵고 있는 호텔로 찾아가봤지만, 역시나 맨유법은 취재진의 순진한 기대를 외면했다.
하는 수없이 경기를 취재하는 것으로 그 날은 만족해야 했다.

그나마 경기를 통해 느낀 것은 일본 관중들이 중국 관중들과 대조적으로 박지성을 꽤나 열렬히 환호했다는 것, 그리고 경기 중에 약간의 지진이 발생하는 바람에 일본에 왔다는 것을 식은 땀 흘리며 실감했다는 것 정도였다.
이 날 경기에서 박지성은 눈언저리가 찢어지는 문제의 부상을 당했다.

이튿날은 맨유 측이 한국 언론들의 잦은 요청 탓인지 공식 인터뷰에 박지성을 포함시키기로 했던 날이었다.
박지성의 훈련 참가 여부가 잠깐 오락가락하긴 했지만 예정대로 맨유 측은 ‘박지성이 거부하지 않는다면’ 이라는 조건 아래 인터뷰를 허락했고 박지성은 초췌해진 취재진의 몰골을 보고는 기꺼이 응해줬다.

전날 입은 부상 정도가 초미의 관심사가 됐던 까닭에 인터뷰의 가치도 그만큼 높아져 결과적으로는 전화위복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맨유 측이 부상 탓에 박지성을 우라와 레즈와의 경기에 내보내지 않기로 하면서 취재진도 하루 빨리 귀국했고, 그대로 ‘맨유法’ 탐방기도 끝났다.

사실 지루하게 줄줄 늘어놓은 이 글에 새로운 내용이랄 것은 없다.
하지만 당시의 결과야 그렇다쳐도, 선수의 인터뷰가 극도로 제한되는 이런 상황이 선수 개개인을 보호하고자 하는 의도라기보다는 짙은 상업적 의도(초상권 등과 연관된) 때문이라는 느낌에 썩 유쾌하지 않았다.

흔히, 미국의 메이저리그가 지나치게 상업적이라는 비난을 받곤 하는데, 맨유를 필두로 한 명문 유럽 축구 클럽을 보면 메이저리그를 가뿐히 능가하는 놀라운 상업적 수완을 발휘하는 모습에 씁쓸한 감탄사를 내뱉기도 한다.

단적으로 메이저리그의 대어급 투수인 뉴욕 메츠의 페드로 마르티네스를 인터뷰하는 것이 박지성 만나는 것보다 훨씬 쉬웠다는 느낌이다.
(“페드로가 박지성보다 더 대단하기라도 하다는 거야?” 같은 질문은 사양하니 양해 바라며 오해도 없으시길.)

그렇지만 다행이다.
새로운 맨유법 탓에 잠시나마 우왕좌왕했던 취재진과는 달리, 박지성은 기대 이상으로 쉽게 맨체스터 생활에 적응하는 것 같다.
사실 맨유법이니 뭐니 치기어린 소리를 잠시 늘어놓긴 했지만, 가장 중요한 건 박지성의 성공 여부가 아니겠는가!